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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뉴스/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이슬람 - 기독교의 뿌리(2) / 2007-07-12

에티오피아, 이슬람 - 기독교의 뿌리(2)

암다 시욘 1세 황제(1313 - 1344)는 에티오피아 황실의 통제를 통해 무역로를 계속 확보한다는 정책기조를 유지했다.  이는 에티오피아의 경제는 발전시키면서도 이슬람의 확장은 막겠다는 의도이다.  거기에 덧붙여 에티오피아의 외연을 넓히는 정책도 함께 추구했다.  즉 그의 1차적 관심사는 정치와 경제이지 종교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 환경에서 이슬람 신자들은 다른 이교도들과 마찬가지로 황제에게 세금과 노역을 바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꾸준히 발전시키고 세력도 서서히 확대해 나갔다.  결국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건대 당시 이슬람 신자들의 삶은 사실상 자치권이 부여된 사회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자신의 문화와 종교가 유지되었고, 그리고 아주 크고 중요한 일이 아닌 이상 자치적으로 세워진 지도자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조금씩 자신들의 거주하는 땅의 독립을 추구하며, 자신들의 땅이 마치 에티오피아 왕국의 식민지처럼 되어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평화를 깨뜨리고 전쟁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은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또하나 유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에티오피아 자체가 여러 종교와 문화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왕실이 직할하는 종족과 지역이 있었고, 이슬람권, 또 다른 이교도들과 소수종족들이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즉 크게 보면 아마라계 기독교 문화와 권력의 큰 우산 안에 있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그리고 이질적인 집단들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에티오피아 황실과 이슬람 신자들과의 관계는 애매하고 갈등도 없지 않은 관계였다.  그러나 암다 시욘 황제는 “나는 에티오피아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슬람 신자의 황제이기도 하다”라고 스스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는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인 동시에 무력으로 제압하지 않겠다는 온건통치노선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온건 노선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황실 아래서도 이슬람 신자들이 자신들의 믿음과 삶의 방식을 별 무리 없이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대를 이어 즉위한 황제들이 계속해서 이러한 관용적인 정책을 계속하는 한 이슬람 신자들의 사실상의 자치적인 커뮤니티도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이처럼 공존의 분위기 속에서 에티오피아의 국경 밖의 이슬람 신자들도 국경 안으로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적 증가는 장차 황실의 권위와 장악력이 약화된다면 황실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정도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황실 군대와 이슬람 신자 그룹들 간의 무력충돌도 벌어지기도 했으나 아직까지는 황실의 승리로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암다 시욘 황제가 죽고 자라 야코브황제(1399 - 1468)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전임 황제보다는 훨씬 강력했다.  그는 이슬람 신자들에게 개종을 강요했고, 이러한 강경책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처벌하기도 했다.  또 적지 않은 이슬람 신자들이 죽거나 구속되거나, 폭행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힘겹게 견디고 있던 이슬람 신자들은 결국 지하드의 대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아흐마드 이븐 이브리힘 알 가지였다.  지하드가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지하드세력은 오토만이라 이름 붙은 외부세력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황실 군대에게는 별다른 지원세력이 없었다.  또 에티오피아왕국의 종교적 사회적 단결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에티오피아 자체가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미 종교를 초월한 통혼이 벌어지고 있었고, 기독교를 믿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개종도 흔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귀족과 천민들 사이의 반목도 에티오피아의 단결을 저해하는 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