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이슬람 - 기독교의 뿌리
지금 에티오피아는 기독교인들과 이슬람 신자들 사이에 치열한 긴장과 갈등, 그리고 무력 충돌을 겪는 혼란에 빠져 있다. 최근 카나다에 거주하는 한 에티오피아 출신 이민은 한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이와 같은 갈등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양 종교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후 당시 에티오피아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계가 소수의 이슬람계 주민들에 대한 관용을 베푼데서 시작된다. 기독교계의 관용 속에서 이슬람계는 그 세력을 안정적으로 키워갔고, 그 세력이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가자 지하드를 감행하고 나선 것이다.
14세기부터 시작되어 16세기까지 계속된 양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해 당시 이슬람 세력은 거의 소멸 직전까지 갔었다. 특히 1527년부터 1543년 사이에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계의 강력한 토벌 작업으로 인해 극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계로 구성되어 있던 에티오피아 왕국의 왕조는 기본적으로는 비기독교인들과 종족들에 대한 관용정책에 충실했다. 이런 관용으로 인해 이슬람은 소멸은 면할 수 있었고, 재기의 발판도 된 것이며, 결국은 그 세력을 다시 크게 키워 16세기 말경부터는 강력한 지하드 투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흐마드 이븐 이브리힘 알 자지(1506 - 1543)은 일명 가란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이슬람에 의한 반기독교 강경 투쟁을 전재한 사람이며 그의 투쟁은 1527년부터 시작하여 그가 전투 중 사망한 1543년까지 계속된다. 가란은 에티오피아 남동부 이슬람 가문인 아달 가문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하드에 대해서 듣고 보고 자라났으며, 기독교인들에 의해 동족들이 크게 패하고 살해당하는 것에 대해 울분을 품으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 시절의 경험은 그를 당연히 지하드에 투신하게 만든다. 그는 아달 가문의 술탄을 살해하는 사실상의 종족 내의 쿠데타를 일으킨 후 스스로 아달 가문의 지도자이자 임맘임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에티오피아 황제에 대한 세금 납부 거부를 선언했다. 또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도처에 널린 기독교적 내용의 예술작품을 파괴하고 관련 서적을 약탈하여 소각하고 대신 이슬람 사원과 건축물을 세우는 방식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때가지만 해도 에티오피아는 비록 정부가 이슬람계 주민들을 억누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다종교 국가였다. 기독교 중심으로 구성된 황실은 국경 내의 다양한 종족들이 일정한 세금을 바치는 조건 하에서 그들의 종교생활과 문화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했다. 때문에 적지 않는 지역의 종족들은 기독교와는 상관 없는 자신들만의 종교와 문화를 신봉했다. 이슬람계 종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슬람계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대상활동을 통한 국내외의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활동의 폭이 매우 넓었다.
반면 기독교계 주민들은 황실이 있는 고원지대에서 벗어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독교 안에서도 분파적 내홍이 있었다. 겉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분명하게 단결하고 있는 듯 했지만, 안으로는 분파가 갈리고 있었는데 그 분파는 오늘날 각각 에티오피아정교회와 이집트 콥틱교회 등으로 분화되었다. 어쨌든 장사와 무역에 능한 이슬람 신자들은 전국의 많은 곳을 돌아다니게 되고, 기독교인들과도 사업상의 이유로 자주 만나고 부딪히게 되지만 기독교인들을 그들을 특별하게 인식하기보다는 에티오피아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른 종교 그룹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여 특별한 차별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업에 종사하며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고마움 때문에 다른 이교도들보다는 훨씬 호의적인 대접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이 이런 식으로 은밀하게 세력을 넓히고 거기에 호전적인 지도자가 들어서자 이슬람은 전혀 다른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측은 더 이상 공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갈등을 겪기 시작한 것이다.
에티오피아인들이 이슬람을 처음 접한 것은 7세기, 즉 마호멧의 아들과 후예들이 이른바 지하드를 벌이며 왕성하게 이슬람 세력을 넓힐 당시였다. 당시 적지 않은 에티오피아의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으로 피신하여 난민과 같은 신세로 전락했었다. 또 이집트의 콥틱교회를 도와 싸우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슬람과 에티오피아인들은 적대적인 관계가 고착화되게 되었다.
양측간의 접촉이 이처럼 적대적인 부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에티오피아와 이슬람 대상들은 무역을 하는 무역파트너이기도 했다. 규모가 큰 대상 무리들이 에티오피아 내부 깊숙한 지역까지 들어오기도 했다. 또 홍해와 이집트지역까지도 진출했다. 이러한 대상무리들 가운데 일부가 에티오피아에 정착하면서 에티오피아 안에도 이슬람 정착민들이 생겨났고, 그 세력도 점점 확장되어 나갔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상업적 기득권을 통해 존재기반을 공고히 해 나가는 한편 에티오피아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경제적 혜택을 주는 관계 즉 서로 윈윈하는 관계 였다. 그러나 정착하는 대상의 수가 늘어나고 이슬람 주민들이 늘어나자 그들은 자신들의 정착지역을 점차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왕국은 이들의 확장을 서서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갈등의 싹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 에티오피아는 기독교인들과 이슬람 신자들 사이에 치열한 긴장과 갈등, 그리고 무력 충돌을 겪는 혼란에 빠져 있다. 최근 카나다에 거주하는 한 에티오피아 출신 이민은 한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이와 같은 갈등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양 종교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후 당시 에티오피아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계가 소수의 이슬람계 주민들에 대한 관용을 베푼데서 시작된다. 기독교계의 관용 속에서 이슬람계는 그 세력을 안정적으로 키워갔고, 그 세력이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가자 지하드를 감행하고 나선 것이다.
14세기부터 시작되어 16세기까지 계속된 양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해 당시 이슬람 세력은 거의 소멸 직전까지 갔었다. 특히 1527년부터 1543년 사이에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계의 강력한 토벌 작업으로 인해 극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계로 구성되어 있던 에티오피아 왕국의 왕조는 기본적으로는 비기독교인들과 종족들에 대한 관용정책에 충실했다. 이런 관용으로 인해 이슬람은 소멸은 면할 수 있었고, 재기의 발판도 된 것이며, 결국은 그 세력을 다시 크게 키워 16세기 말경부터는 강력한 지하드 투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흐마드 이븐 이브리힘 알 자지(1506 - 1543)은 일명 가란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이슬람에 의한 반기독교 강경 투쟁을 전재한 사람이며 그의 투쟁은 1527년부터 시작하여 그가 전투 중 사망한 1543년까지 계속된다. 가란은 에티오피아 남동부 이슬람 가문인 아달 가문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하드에 대해서 듣고 보고 자라났으며, 기독교인들에 의해 동족들이 크게 패하고 살해당하는 것에 대해 울분을 품으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 시절의 경험은 그를 당연히 지하드에 투신하게 만든다. 그는 아달 가문의 술탄을 살해하는 사실상의 종족 내의 쿠데타를 일으킨 후 스스로 아달 가문의 지도자이자 임맘임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에티오피아 황제에 대한 세금 납부 거부를 선언했다. 또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도처에 널린 기독교적 내용의 예술작품을 파괴하고 관련 서적을 약탈하여 소각하고 대신 이슬람 사원과 건축물을 세우는 방식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때가지만 해도 에티오피아는 비록 정부가 이슬람계 주민들을 억누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다종교 국가였다. 기독교 중심으로 구성된 황실은 국경 내의 다양한 종족들이 일정한 세금을 바치는 조건 하에서 그들의 종교생활과 문화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했다. 때문에 적지 않는 지역의 종족들은 기독교와는 상관 없는 자신들만의 종교와 문화를 신봉했다. 이슬람계 종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슬람계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대상활동을 통한 국내외의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활동의 폭이 매우 넓었다.
반면 기독교계 주민들은 황실이 있는 고원지대에서 벗어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독교 안에서도 분파적 내홍이 있었다. 겉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분명하게 단결하고 있는 듯 했지만, 안으로는 분파가 갈리고 있었는데 그 분파는 오늘날 각각 에티오피아정교회와 이집트 콥틱교회 등으로 분화되었다. 어쨌든 장사와 무역에 능한 이슬람 신자들은 전국의 많은 곳을 돌아다니게 되고, 기독교인들과도 사업상의 이유로 자주 만나고 부딪히게 되지만 기독교인들을 그들을 특별하게 인식하기보다는 에티오피아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른 종교 그룹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여 특별한 차별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업에 종사하며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고마움 때문에 다른 이교도들보다는 훨씬 호의적인 대접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이 이런 식으로 은밀하게 세력을 넓히고 거기에 호전적인 지도자가 들어서자 이슬람은 전혀 다른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측은 더 이상 공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갈등을 겪기 시작한 것이다.
에티오피아인들이 이슬람을 처음 접한 것은 7세기, 즉 마호멧의 아들과 후예들이 이른바 지하드를 벌이며 왕성하게 이슬람 세력을 넓힐 당시였다. 당시 적지 않은 에티오피아의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으로 피신하여 난민과 같은 신세로 전락했었다. 또 이집트의 콥틱교회를 도와 싸우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슬람과 에티오피아인들은 적대적인 관계가 고착화되게 되었다.
양측간의 접촉이 이처럼 적대적인 부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에티오피아와 이슬람 대상들은 무역을 하는 무역파트너이기도 했다. 규모가 큰 대상 무리들이 에티오피아 내부 깊숙한 지역까지 들어오기도 했다. 또 홍해와 이집트지역까지도 진출했다. 이러한 대상무리들 가운데 일부가 에티오피아에 정착하면서 에티오피아 안에도 이슬람 정착민들이 생겨났고, 그 세력도 점점 확장되어 나갔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상업적 기득권을 통해 존재기반을 공고히 해 나가는 한편 에티오피아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경제적 혜택을 주는 관계 즉 서로 윈윈하는 관계 였다. 그러나 정착하는 대상의 수가 늘어나고 이슬람 주민들이 늘어나자 그들은 자신들의 정착지역을 점차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왕국은 이들의 확장을 서서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갈등의 싹이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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