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혼미한 대선정국과 선교
터키에서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첫 투표가 의회에서 열렸으나 절차상 별로 문제가 없어 보이는 대통령 선출투표가 법원에 의해 무효 선언이 되었다. 그러나 여야는 이와 같은 법원의 판결에 대해 어떤 반박도 저항도 하지 않는 대신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에 새로운 총선거를 실시하여 의회를 다시 구성하는 한편 대통령 선거 방식을 의회선거에서 국민직선 방식으로 바꾸기로 결의했다. 또 국민들도 이같은 법원의 납득하기 힘든 결정에 대해 별다른 저항과 반감이 없어 보인다. 법원의 판결도, 이 판결에 대한 의회와 국민의 반응도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기이하기 짝이 없다. 이같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터키 특유의 정치체제인 아타투르퀴즘을 이해해야만 한다. 또 앞으로의 헌법 개정, 의회 선거, 대통령 선출은 앞으로의 터키 선교의 상황을 미리 예상해 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변수이다.
현대 터키의 건국은 1924년의 케말파샤 라는 군지도자의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케말 파샤의 원래 본명은 무스타파 케말이고, 파샤는 장군이라는 의미이다. 이후 그는 정권을 잡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대통령에 재임하면서 터키의 아버지, 즉 아타투르퀴즘 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는다. 이 호칭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지금도 국부로 추앙 받고 있으며, 현대 터키의 기틀과 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국민들로부터 사후에까지 큰 존경을 받고 있다. 터키의 현재를 지탱하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아타투르퀴즘은 그의 정치사상 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터키의 대선을 놓고 벌어지는 혼미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아타투르퀴즘을 이해해야 한다. 1924년 현대 터키가 건국되기 직전까지 터키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으로 존재해 왔다. 오스만 투르크는 대단이 넓은 지역을 석권하는 강대한 제국이었다. 그러나 케말파샤가 군사혁명을 일으킬 당시에는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케말파샤는 투르크제국의 몰락의 원인이 시대에 뒤떨어진 봉건적 이슬람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집권 후 국왕을 폐지하고, 대통령이 다스리는 공화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여 종신토록 대통령직에 재임했다. 그는 또 터키에서 이슬람교는 전국민의 98%가 믿는 국가적 종교인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는 어디까지나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러야 하며, 종교가 국가의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해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종교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종교적 율법을 국민에게 강요하거나 이를 준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권력으로 처벌하는 따위의 일은 국가의 경제발전과 국민들의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것이 아타투르퀴즘의 근간이며 현대 터키를 이끌어가는 이념이다.
어느 면에서 터키는 이슬람국가라고 할 수도 있다. 국민의 98%가 이슬람 신자이고, 기독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다른 종교를 믿을 자유는 있지만, 다른 종교를 이슬람 신자에게 전파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터키에서는 이슬람원리주의와 보수주의는 배격된다. 예를 들어서 한 여성 국회의원이 이슬람 전통복장을 입고 국회에 등원했다가 국회 경비원에 의해 국회 건물 진입 자체를 금지당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정치적으로도 당헌이나 당규에 이슬람보수주의를 강령으로 명시한 정당은 재판을 거쳐 해산된다. 당헌 당규를 통해 명시적으로 이슬람 보수주의를 추종하지는 않더라도 정치행태나 정책이 지나치게 이슬람보수주의에 가깝다고 판단될 경우도 법원은 정당을 해산시킬 수 있다. 건국 이후 정당 해산은 세 차례나 있었으며, 한번은 국정을 담당하는 집권당이 해산된 적도 있었다.
때문에 터키에서는 극우적 성향의 정당은 존재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극우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보수적인 정당이 집권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이러할 경우, 즉 집권당의 보수성이 우려할 정도이거나 사회 전체의 우경화가 아타투르퀴즘을 위협할 정도라고 판단될 경우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 일시적으로 헌정을 중지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군부 쿠데타에 대한 터키 국민의 태도이다. 군부 쿠데타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개 동서고금을 마련하고 성공한 쿠데타의 지도자는 스스로 국가를 통치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미리 짜여진 각본에 의해 치러진 선거를 통해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하며, 한번 취임한 후에는 종신집권을 추진하다가 대개는 또 다른 쿠데타나 시민혁명에 의해 비참한 말로를 맞는 것이 일반적인 군부쿠데타의 시나리오이다.
그러나 터키의 쿠데타는 기묘하다. 군부는 아타투르퀴즘이 위협 받는다고 생각되면 어김없이 나오지만, 절대로 장기집권으로 가지 않는다. 6개월 내지 1년 간의 군정기간을 통해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다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의회를 구성하고 총리와 대통령을 뽑고 군대는 원대복귀한다. 케말파샤는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군인들은 케말파샤의 후계자임을 자임하기 때문에, 군은 아타투르퀴즘의 충실한 그리고 가장 강력한 추종자들이다. 또 터키의 명망가의 유능한 젊은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학교가 육군사관학교이다. 그러므로 군은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기도 하다. 게다가 법조인, 언론인, 학자, 지식인 등 터키의 지도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세력 역시 아타투르퀴즘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다. 그러므로 군부 쿠데타가 나더라도 이것은 한시적인 것이 분명하고, 쿠데타 세력이 아타투르퀴즘을 지지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는 달리 지식인사회나 언론 조차도 쿠데타를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반기는 것이 터키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집권 정의개발당의 압둘라 굴 후보(현 외무장관)이 단독출마한 가운데 치러졌다. 야당이 후보를 내지 못한 이유는 집권당이 최근 몇 년 간의 높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후보를 내도 당선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회 의석의 과반 이상을 여당인 정의개발당이 차지하고 있다. 터키의 대통령 선거는 의회 의원의 투표로 진행되며, 재석의원 550명 가운데 2/3인 367표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굴 후보는 2/3에 10표 모자라는 361표를 얻어 당선에 실패했다. 이 경우 2차 투표를 하게 되고, 여기서도 2/3가 안나오면, 3차투표로 가는데 3차투표에서는 과반만 득표해도 된다. 그러므로 집권당은 2차를 거쳐, 3차로 가면 당선은 확실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법원은 1차 투표 자체를 무효선언을 하므로서 2차투표를 거쳐, 3차투표로 가는 가능성 자체를 막아 버렸다. 여기에 군부는 공공연하게 굴 후보가 당선되면 개입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정의개발당과 현정부가 극보수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보수적인 정당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 자체가 어느 정도 보수성향을 지향하고 있! 을 뿐 아니라 현재의 정부의 총리인 에르도한 역시 상당히 보수적인 인사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조차도 정의개발당에서 맡게 되면, 아타투르퀴즘이 위협을 받는 다는 것이 군부의 주장이다.
터키에서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첫 투표가 의회에서 열렸으나 절차상 별로 문제가 없어 보이는 대통령 선출투표가 법원에 의해 무효 선언이 되었다. 그러나 여야는 이와 같은 법원의 판결에 대해 어떤 반박도 저항도 하지 않는 대신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에 새로운 총선거를 실시하여 의회를 다시 구성하는 한편 대통령 선거 방식을 의회선거에서 국민직선 방식으로 바꾸기로 결의했다. 또 국민들도 이같은 법원의 납득하기 힘든 결정에 대해 별다른 저항과 반감이 없어 보인다. 법원의 판결도, 이 판결에 대한 의회와 국민의 반응도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기이하기 짝이 없다. 이같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터키 특유의 정치체제인 아타투르퀴즘을 이해해야만 한다. 또 앞으로의 헌법 개정, 의회 선거, 대통령 선출은 앞으로의 터키 선교의 상황을 미리 예상해 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변수이다.
현대 터키의 건국은 1924년의 케말파샤 라는 군지도자의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케말 파샤의 원래 본명은 무스타파 케말이고, 파샤는 장군이라는 의미이다. 이후 그는 정권을 잡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대통령에 재임하면서 터키의 아버지, 즉 아타투르퀴즘 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는다. 이 호칭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지금도 국부로 추앙 받고 있으며, 현대 터키의 기틀과 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국민들로부터 사후에까지 큰 존경을 받고 있다. 터키의 현재를 지탱하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아타투르퀴즘은 그의 정치사상 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터키의 대선을 놓고 벌어지는 혼미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아타투르퀴즘을 이해해야 한다. 1924년 현대 터키가 건국되기 직전까지 터키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으로 존재해 왔다. 오스만 투르크는 대단이 넓은 지역을 석권하는 강대한 제국이었다. 그러나 케말파샤가 군사혁명을 일으킬 당시에는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케말파샤는 투르크제국의 몰락의 원인이 시대에 뒤떨어진 봉건적 이슬람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집권 후 국왕을 폐지하고, 대통령이 다스리는 공화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여 종신토록 대통령직에 재임했다. 그는 또 터키에서 이슬람교는 전국민의 98%가 믿는 국가적 종교인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는 어디까지나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러야 하며, 종교가 국가의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해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종교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종교적 율법을 국민에게 강요하거나 이를 준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권력으로 처벌하는 따위의 일은 국가의 경제발전과 국민들의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것이 아타투르퀴즘의 근간이며 현대 터키를 이끌어가는 이념이다.
어느 면에서 터키는 이슬람국가라고 할 수도 있다. 국민의 98%가 이슬람 신자이고, 기독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다른 종교를 믿을 자유는 있지만, 다른 종교를 이슬람 신자에게 전파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터키에서는 이슬람원리주의와 보수주의는 배격된다. 예를 들어서 한 여성 국회의원이 이슬람 전통복장을 입고 국회에 등원했다가 국회 경비원에 의해 국회 건물 진입 자체를 금지당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정치적으로도 당헌이나 당규에 이슬람보수주의를 강령으로 명시한 정당은 재판을 거쳐 해산된다. 당헌 당규를 통해 명시적으로 이슬람 보수주의를 추종하지는 않더라도 정치행태나 정책이 지나치게 이슬람보수주의에 가깝다고 판단될 경우도 법원은 정당을 해산시킬 수 있다. 건국 이후 정당 해산은 세 차례나 있었으며, 한번은 국정을 담당하는 집권당이 해산된 적도 있었다.
때문에 터키에서는 극우적 성향의 정당은 존재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극우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보수적인 정당이 집권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이러할 경우, 즉 집권당의 보수성이 우려할 정도이거나 사회 전체의 우경화가 아타투르퀴즘을 위협할 정도라고 판단될 경우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 일시적으로 헌정을 중지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군부 쿠데타에 대한 터키 국민의 태도이다. 군부 쿠데타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개 동서고금을 마련하고 성공한 쿠데타의 지도자는 스스로 국가를 통치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미리 짜여진 각본에 의해 치러진 선거를 통해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하며, 한번 취임한 후에는 종신집권을 추진하다가 대개는 또 다른 쿠데타나 시민혁명에 의해 비참한 말로를 맞는 것이 일반적인 군부쿠데타의 시나리오이다.
그러나 터키의 쿠데타는 기묘하다. 군부는 아타투르퀴즘이 위협 받는다고 생각되면 어김없이 나오지만, 절대로 장기집권으로 가지 않는다. 6개월 내지 1년 간의 군정기간을 통해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다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의회를 구성하고 총리와 대통령을 뽑고 군대는 원대복귀한다. 케말파샤는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군인들은 케말파샤의 후계자임을 자임하기 때문에, 군은 아타투르퀴즘의 충실한 그리고 가장 강력한 추종자들이다. 또 터키의 명망가의 유능한 젊은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학교가 육군사관학교이다. 그러므로 군은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기도 하다. 게다가 법조인, 언론인, 학자, 지식인 등 터키의 지도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세력 역시 아타투르퀴즘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다. 그러므로 군부 쿠데타가 나더라도 이것은 한시적인 것이 분명하고, 쿠데타 세력이 아타투르퀴즘을 지지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는 달리 지식인사회나 언론 조차도 쿠데타를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반기는 것이 터키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집권 정의개발당의 압둘라 굴 후보(현 외무장관)이 단독출마한 가운데 치러졌다. 야당이 후보를 내지 못한 이유는 집권당이 최근 몇 년 간의 높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후보를 내도 당선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회 의석의 과반 이상을 여당인 정의개발당이 차지하고 있다. 터키의 대통령 선거는 의회 의원의 투표로 진행되며, 재석의원 550명 가운데 2/3인 367표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굴 후보는 2/3에 10표 모자라는 361표를 얻어 당선에 실패했다. 이 경우 2차 투표를 하게 되고, 여기서도 2/3가 안나오면, 3차투표로 가는데 3차투표에서는 과반만 득표해도 된다. 그러므로 집권당은 2차를 거쳐, 3차로 가면 당선은 확실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법원은 1차 투표 자체를 무효선언을 하므로서 2차투표를 거쳐, 3차투표로 가는 가능성 자체를 막아 버렸다. 여기에 군부는 공공연하게 굴 후보가 당선되면 개입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정의개발당과 현정부가 극보수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보수적인 정당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 자체가 어느 정도 보수성향을 지향하고 있! 을 뿐 아니라 현재의 정부의 총리인 에르도한 역시 상당히 보수적인 인사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조차도 정의개발당에서 맡게 되면, 아타투르퀴즘이 위협을 받는 다는 것이 군부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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