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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뉴스/전체일반

서부아프리카, 프랑스 식민지의 그늘(1) / 2007-04-11

서부아프리카, 프랑스 식민지의 그늘(1)

프랑스는 1790년까지만해도 서부 아프리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당시 프랑스는 세네갈에 세인트 루이스라는 이름의 작은 항구를 노예수출 기지로 활용하고 있는 것 정도가 서부 아프리카 진출의 전부였다. 게다가 당시 노예무역은 프랑스가 주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당시 노예 수출을 주도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와 라이벌 관계이던 영국이 서부 아프리카에 진출한 것에 프랑스도 자극을 받기 시작했다. 1796년, 영국의 탐험가인 뭉고 파크는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니제르 강을 탐험했다. 니제르강은 서부 아프리카의 심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도 큰 강이었다. 이미 프랑스와 영국은 1500 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세계 전역에서 식민지쟁탈 경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 간의 라이벌 구도는 서부 아프리카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뭉고 파크의 니제르강 진출이 사실로 확인되자 프랑스도 서부 아프리카 진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영국의 움직임을 보면서 영국 탐험가들의 활동이 단순한 탐험이 아니라 이 지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속셈이 있음을 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1827년에는 렌 카엘이 프랑스의 탐험대를 이끌고 서부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 탐험을 통해 1년 만에 전설의 도시로만 전해 내려오던 팀북투를 발굴해 내는 성과를 올렸다. 그의 탐험성과는 프랑스가 이 지역에 대한 식민지 기득권을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1830년, 프랑스는 아주 우연한 과정을 거쳐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얻었다. 알제리의 고위 인사가 프랑스의 외교관을 모독한 일련의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는 보복 공격을 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제리를 정복한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이후 대거 이 지역으로 이주했고, 알제리에 집단거주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는 이 지역을 식민지화할 생각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후 1871년까지도 프랑스는 또 다른 지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을 봐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로 하여금 식민지를 개척하도록 자극을 준 것은 독일이었다.

1871년 독일은 무력으로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빼앗았다. 이는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그렇다고 독일과 전쟁을 벌이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프랑스는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편으로 아직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처녀지로 진출을 확대하는 작업을 왕성하게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지성인들도 이 같은 움직임을 부추겨 그럴듯한 명분과 논리로 식민지 개척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결국 프랑스는 몇몇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몇몇 조각으로 나누어 먹는 작업을 주도하게 된다.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아프리카를 왕성하게 나눠먹는 작업에 동참한 나라들이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나라가 서로 식민지권을 주장하는 이른바 경계지역은 긴장이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이들 국가는 아예 베를린에 모여 아프리카를 나눠 먹기 위한 경계를 확정하는 회의를 열게 된다. 이른바 베를린 회담이다. 이 회담의 결과로 프랑스는 열강들로부터 서부 아프리카의 맹주로 공인 받기에 이른다. 프랑스는 독일과 영국,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몇몇 해안지대를 제외한 서부 아프리카에 대한 명실상부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통치권은 유럽국가들끼리의 국제조약을 통해 공인을 받은 것이다. 프랑스의 아프리카에 대한 문화적 이해는 단순 명료했다. 아프리카 문화는 열등함으로 교육과 계몽을 통해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통치 행정기관들은 서부 아프리카에 프랑스어를 보급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프랑스인화 하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본의가 아닌지는 모르지만 프랑스에서 들어온 카톨릭 선교사들도 이 작업에 단단히 한몫 거들었다. 프랑스 정부는 기독교 복음 전파가 아프리카인들을 프랑스 시민으로 개조하는데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고 선교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그 결과로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지식으로는 기독교에 대해서 학습하면서도 실제 생활 속에서는 전통 무속과 정령숭배를 계속하게 되었다. 또 사하라사막지대에서는 선교사들은 그나마의 표면적인 변화마저도 이끌어 내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아랍인들을 기독교로 개종하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이 지역은 이미 견고한 이슬람 지역이었기 때문에 해안지대와 달리 카톨릭 선교사들의 메시지가 전혀 먹혀들지 않은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프랑스인들이 식민지에 기독교와 프랑스어를 적극적으로 보급한 이면에는 문화적 우월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월주의를 피부로 느끼고 있던 아프리카인들은 프랑스 문화와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어와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아프리카인들을 그리 많지 않았다. 대개 프랑스의 식민통치 사회에서 일정부분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사람들이 비교적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 결국 기독교는 서부 아프리카 지역에 폭넓게 퍼졌으나 아프리카인들에게 독실하고 깊고, 헌신적인 신앙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식민통치자들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기독교인으로서 행세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행세일 
뿐이다. 그래야 그들에게 떨어지는 혜택도 많기 때문이다.

1차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선발한 병력에 큰 의존을 하게 된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아프리카에서 징발한 병력들이다. 전쟁이 끝나자 이들 군인들은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들은 이미 유럽의 전장에서 독일과 전쟁을 벌이면서 상당한 수준의 전투력을 익힌 역전의 용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돌아간 것이다. 여기에 아프리카 민족주의가 결합하게 되자 식민통치정부들은 이들에 대한 상당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실제로 이들은 훗날 서부 아프리카 독립무장투쟁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의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도 또 다시 아프리카출신 용병들의 신세를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