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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뉴스/전체일반

서부아프리카, 프랑스 식민지의 그늘(2) / 2007-04-12

서부아프리카, 프랑스 식민지의 그늘(2)

2차대전이 끝났을 때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지만 전쟁의 피해로 인해 기력을 완전히 탈진한 듯한 상황이었다. 식민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조차 조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반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아프리카의 나라들과의 연대를 끊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첫째로 프랑스인들이 이미 아프리카에 너무 많이 살고 있었다. 특히 알제리에 살고 있는 프랑스 국적자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독립시킬 경우 아프리카의 프랑스인들은 기득권세력에서 갑자기 인종적 소수파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고 자칫 자신을 식민통치했던 프랑스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폭력에 희생될 수도 있었다.

두 번째로 이들 식민지들은 프랑스에 있어서는 안정적인 자원 조달기지였다. 니제르와 가봉은 풍부한 우라늄광을 가진 나라이다. 1945년 이후, 핵무기 제조능력은 그 나라의 국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다면 우라늄보급기지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이나 소련과는 달리 프랑스는 자국의 영토 내에 우라늄광이 전혀 없다. 아프리카의 우라늄이 없다면 프랑스는 핵무기 제조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들은 1960년들어 대거 독립한다. 식민정권이 현지인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정권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작업은 순조로왔다. 알제리 정도가 예외적인 경우였을 뿐 대체로 순조로왔다. 알제리는 프랑스군이 떠나 생긴 무력 공백으로 인해 현지 아랍인들과 프랑스인 거류민들 사이에 2년 간의 내전이 발생했다. 결국 아랍인들이 이겼고, 그 와중에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살해되었거나 보따리를 싸 탈출했다.

독립했다고해서 프랑스가 서부 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신생독립국들과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무역관련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의 기업은 이 지역 진출이 다른 나라의 기업보다 훨씬 용이했다. 또 일부 국가와는 유사시에 프랑스군의 간섭을 허용하는 조약도 체결했다. 또 대부분의 서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여전히 프랑스의 프랑화 화폐를 사용함으로써 이 지역의 경제는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또 다른 식민통치의 확실한 그림자는 언어이다. 지금도 프랑스어 구사 능력은 서부 아프리카의 상류 사회의 상징이다. 또 지금의 상류 사회나 지도층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형성된 지도층과 그 후손들이다. 식민지 시절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에 배타적이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식민지 시대의 지도층을 형성했고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서부 아프리카에서의 프랑스의 위치는 어정쩡하다. 적극적으로 이 지역의 내정에 간섭하기도 어렵지만 이 지역의 정부와 맺은 조약 때문에 이 지역의 내정을 아예 남의 일보듯 하기도 어려운 입장이다. 1994년 프랑스는 이 지역의 내정에서 완전히 발을 빼기 위한 시도를 했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르완다의 경우 프랑스군이 완전히 철수하고 허약한 정부군만 남자, 후투족 무장세력이 봉기하여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에 속한 양민 80만명을 학살했다. 그러자 세계는 이 같은 사태의 원인을 이 지역의 힘의 균형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프랑스에 돌리고 프랑스를 비난하며 즉각개입을 촉구했다. 코트디브아르의 내전사태도 프랑스가 이 지역에서 빠져나감으로 생긴 힘의 공백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러자 프랑스는 이 나라가 제2의 르완다가 될 것을 크게 우려하여 즉각 개입하여 양측의 중재에 나섰다. 프랑스는 이처럼 서부 아프리카의 내정과 역학구도에서 발을 빼고 싶은 입장이지만, 이를 행동에 옮기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서 서부 아프리카 선교는 여러모로 거센 도전에 시달리고 있다. 일부 지도층이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프랑스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도층으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동안 민중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반감과 다른 종족에 대한 적대감에 기초한 배타적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많은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카톨릭국가인 프랑스는 선교사들을 통해 많은 신자들, 즉 개종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물량공세를 펼쳤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혜택을 누리기 위해 카톨릭을 겉으로는 받아들였으나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무속과 정령숭배를 계속하고 있다. 카톨릭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주술사들의 점술과 주술이 성행하고 있다. 베닝은 이러한 주술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주술사들의 제사에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주술사들에 의해 속아 영혼을 사고 파는 행위가 행해지고 자신들은 이미 영혼을 토속 신에게 팔았다고 굳게 믿는 미개한 현지인들은 이미 자신의 영혼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집한다.

서부아프리카에서 최근 맹렬하게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이슬람도 문제이다. 코트디브와르 같은 나라는 종교로 인해 내전까지 발생한 나라이다. 가장 최근에 발생한 코트디브아르의 내전은 종교가 중요한 원인이 되어 일어난 내전이다. 집권세력이 반정부 세력인 남부의 주민들을 강도 높게 탄압했는데 공교롭게도 집권세력은 기독교에 우호적인 세력이고, 남부 주민들은 전통적인 정령숭배자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이슬람이 침투하자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남부 주민들이 속속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결국 내전은 기독교세력 대 이슬람세력의 구도로 전개되었다. 어떤 구도이든 전쟁이 발생하면 복음사역자들은 신변의 위협으로 인해 제대로 활동할 수 없게 된다. 서부 아프리카의 이슬람은 원래의 토속종교와 혼합되어 정확히 그 모습이 이슬람인지 토속신앙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중동의 정통이슬람과는 분명히 다른다. 예를 들어서 이 지역의 이슬람 신자들은 중동의 신자들처럼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