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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뉴스/전체일반

기독교에는 왜 폭탄자살테러가 없는가? / 2007-03-09

기독교에는 왜 폭탄자살테러가 없는가?

흔히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칫 심한 언쟁과 주먹다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고 멀쩡한 친구 사이가 소원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이 어느 종교를 믿고 그 종교에서 주장하는 교리와 신조를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그 종교와 진리를 수호하고 설파하기 위해 상당한 수준의 충성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불쾌감도 느끼고 적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살폭탄테러는 이러한 적대감의 극단적인 표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폭탄테러 등 각종테러행위가 주로 이슬람쪽에서 나오는 반면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벌어지는 테러행위는 거의 없다는 현상에 대해서 원인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기독교에서 진리라고 믿는 교리나 신조에 대한 충성도가 박약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그 교리 안에서 과격 적대행위를 막는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이라크에서는 이슬람 자살폭탄테러 사건이 벌어져 한 초등학교가 박살나는 사건이 있었고, 이와 같은 사건은 사흘이 멀다하고 이라크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져 한국군 윤장호 하사가 희생되기도 했으며, 작년에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오르단 라디손 호텔에서는 결혼식 도중에 자살폭탄테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민간인들과 어린이들이 희생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그 과격성과 잔인성에 분노하게 된다.  특히 결혼식 같은 행사는 삶 자체를 축북하는 행사이다.  조부모로부터 시작해서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가정의 확장에 감사하고 또 다른 가정의 확장을 기약하며 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위한 사랑과 희생을 약속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또 새로운 가정이 서로 맺어지고 그 부부를 통해서 새롭고 창대한 가정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부부는 한 긴 강의 발원지와도 같은 존재가 되는 날이 결혼식이다.  일상적인 사업상의 일을 논의하는 만남의 장이 아닌 결혼식처럼 축복된 장을 테러의 현장으로 선택한 것은 그야말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자동차 폭탄과 자살테러는 이제 거의 매일 보도되는 세계의 일상이다.  특히 이라크에서는 늘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것 같고 뉴스보도는 워낙 자주 일어나다보니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원인과 배경에 대한 분석을 생략한 채 그런 사건이 일어 났다는 사실만을 건조하게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 혹은 단체를 향해 자살폭탄테러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애정과 충성 그리고 믿음과 신앙이 이슬람 신자만 못하다는 말인가?  기독교인들은 보다 높은 진리를 지키기 위한 헌신과 용기가 없다는 말인가?  물론 긴역사까지 따져보면 기독교 쪽도 십자군전쟁이라고 하는 사건을 저지르기는 했었다.  때문에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도 비록 과거의 일이기는 하지만 차량폭탄테러 못지 않은 사건을 저질렀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이슬람 지하드와 과거의 기독교 십자군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과연 차이는 있는 것인가?

물론 차이는 있다.  기독교식 가미가제이야기는 아주 드문 경우이고, 기독교인들 조차도 스스로 비난하는 마치 "개를 물어 뜯은 사람"의 이야기와도 같은 사건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폭력에 대한 인식차이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믿는 신에 대한 인식차이에서 비롯된다.  이슬람 신자에게 알라신은 가장 강력하고 옳고 의로운 존재이다.  물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에 대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과는 다르게 기독교에는 3위가 있다.  즉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라고 하는 같으면서도 서로 다르기도 한 존재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전부터 아주 합리적으로 존재하셨던 분으로 이해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사랑하며 복종하신다.  3위는 서로 교통하는 가운데 세상을 창조하셨다.  3위는 각기 다른 인격을 가지고 상호존중하는 가운데 조화롭게 교통하며 세상을 다스리는 반면 알라신에게는 이러한 교통과 조화와 존중의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낸시 피어시는  그녀의 저서 "전적인 사랑"에서 기독교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마치 친한 친구나 존경하는 분과의 자연스러운 대화와 같은 것이어서 온마음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다윗과 욥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 따지고 투정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또는 친구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젊은이들이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 없네"라고 찬송을 부르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2천 년쯤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의 육체를 입고 이 땅을 거닐었던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마치 사람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도 같은 친밀함이 있다.

반면 이슬람 신자들의 예배는 전적으로 종교적이고 엄숙하다.  매일 다섯차례씩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메카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해야 한다.  서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었다가, 다시 앉아서 코란을 읖조리는 일을 반복한다.  이는 알라신의 뜻에 절대로 복종하겠다는 의지를 열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알라신은 모든 이슬람 신자들에게 무조건적이고 철저한 복종만을 요구한다.  만일 파키스탄이나 사우디 아라비아 쯤에 사는 이슬람 신자들이 "알라신보다 참 좋은 친구 없네"라고 찬양한다면 이는 찬양이 아니라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죄가 성립된다.

알라신과 하나님이 다른 것은 알라신은 철저하게 복종을 요구하고 불복종하는 자를 철저하게 응징하는 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용서가 있다는 점이다.  알라신은 이슬람 신자들에게 신을 위해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 뿐 아니라 전인류에게 자신의 아들을 바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