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변혁기의 기독교의 역할
한자어로 "위기"란 위험과 기회를 의미하는 두 한자의 조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위기라고 하면 위험의 요소만 생각하지만 중국인들은 위험한 상황이야말로 새로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성서적으로 볼 때도 기회는 위험과 함께 찾아오는 것이 맞다. 그 사례는 성경 안팎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어에서 위기를 의미하는 crisis라는 단어는 평탄한 길 위에 쇠스랑이 솟아 있는 위험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뭔가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위기를 맞았을 때 선택의 폭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느낀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베르베르족, 쿠르드족, 그리고 기타 많은 종족들이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 채 여러 세대를 지나면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잃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위기를 맞아 상당한 변화를 꾀하거나 체험한 경우도 있다. 말리의 타마체크족(일명 투아레그족)이나 티벳의 유목민들은 원래는 유목생활을 했으나 이제는 유목 문화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역할구분이 상당히 바뀌어 이제는 그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북한에서는 북한 당국이 전통적인 폐쇄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중국이 1970년대에 했던 것과 같은 식의 변화를 일으켜야 할 필요성은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석유의존적인 경제 시스템에서 벗어나 경제의 패턴을 다변화 하지 않으면 언젠가 석유가 고갈되면 아무 대책 없이 나자빠질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역 사람들이나 인도의 카시미르 사람들은 전쟁 속에서도 끊임 없이 뭔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들 모두는 그들 나름대로의 위기에 직면하여 있는 그룹들이다. 때문에 이 위기에 맞서서 뭔가 변화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변화되는 환경에 끌려갈 것인가, 스스로 변화를 주도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제거해 낼 수도 있고, 반대로 엉뚱한 처방을 내려 오히려 더욱 헤어나기 어려운 나락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지금 이슬람은 세계 모든 위기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슬람의 기치를 그들의 행위의 명분으로 내걸고 있다. 혹자는 테러리스트들이 이슬람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이슬람 추종자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극단적인 도덕사회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나치게 폭력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도덕적 종교사회의 출현이 현대 21세기에 과연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테러리즘을 지하드라고 미화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의 근거를 코란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의 이슬람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는 이슬람 내부에서도 논란꺼리이다. 마찬가지로 힌두교도 큰 변혁을 겪으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서구인들은 힌두교를 생각하면 구루나 그라놀라들 처럼 속세에서 완전히 떠나 초연하게 도를 닦는 도인들을 연상한다. 그러나 힌두테러리스트 조직도 이슬람의 알카에다 못지 않다. 더욱이 힌두교 사회는 내부에서 그들끼리도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즉 상위 카스트에 속한 이들과 3억이나 된다는 불가촉 천민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이다. 이 갈등은 때로는 폭력적인 양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인도의 일간지들을 보면 달리트들에 대한 린치나 테러 등의 사건 기사가 수시로 올라온다. 단순한 테러도 있고 학살이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비참한 살해 사건들도 있다. 달리트그룹들은 최근 힌두교 자체를 거부하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대개 불교로 개종한다.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힌두교 지도부는 신분제도의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던지, 교리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할 처지이다.
기독교도 변화의 문 앞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다른 종교에 비해서 상황이 훨씬 긍정적인 것은 다행한 일이다. 지난 100년 동안 기독교는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져 있으면서도 종파간의 협력과 공존을 위한 모색이 꾸준히 진행되어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룩해 냈다. 기독교계는 선교라는 하나님의 대 위임을 감당하기 위해 꾸준히 활동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지구상의 2/3 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나름대로의 선교적 성과를 이끌어 냈다. 앞으로도 세계선교를 위한 교회의 역량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많은 열방의 족속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놀라운 성취가 있었다.
사람이 위기의 상황에 놓여 있게 되면 대개는 지혜를 발휘하여 그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해법을 찾아낸다. 우리는 힌두교나 이슬람교계도 현재 스스로가 처해 있는 모순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또 이것을 돕기 위해 일정한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종교와 이웃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성경 속에서 찾아지는 희망과 해법을 그들에게 전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생과 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함으로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기 모순 속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전혀 새로운 승리의 희망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대해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과 음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우물을 파주고, 농업관련 프로젝트 사역을 통해서 식량을 자급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거나 가축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작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지금은 이들 힘없는 제3세계 사람들을 향해 기독교인이 적극적으로 도울 때이다. 또 미국에 지금 막 들어와 문화적 충격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민들을 향해서는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적응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안에서 문화적 충격을 겪고 있는 탈북자자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외에도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변화의 시대에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이 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대사로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21세기의 변화의 시대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절호의 기회이다.
한자어로 "위기"란 위험과 기회를 의미하는 두 한자의 조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위기라고 하면 위험의 요소만 생각하지만 중국인들은 위험한 상황이야말로 새로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성서적으로 볼 때도 기회는 위험과 함께 찾아오는 것이 맞다. 그 사례는 성경 안팎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어에서 위기를 의미하는 crisis라는 단어는 평탄한 길 위에 쇠스랑이 솟아 있는 위험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뭔가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위기를 맞았을 때 선택의 폭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느낀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베르베르족, 쿠르드족, 그리고 기타 많은 종족들이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 채 여러 세대를 지나면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잃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위기를 맞아 상당한 변화를 꾀하거나 체험한 경우도 있다. 말리의 타마체크족(일명 투아레그족)이나 티벳의 유목민들은 원래는 유목생활을 했으나 이제는 유목 문화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역할구분이 상당히 바뀌어 이제는 그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북한에서는 북한 당국이 전통적인 폐쇄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중국이 1970년대에 했던 것과 같은 식의 변화를 일으켜야 할 필요성은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석유의존적인 경제 시스템에서 벗어나 경제의 패턴을 다변화 하지 않으면 언젠가 석유가 고갈되면 아무 대책 없이 나자빠질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역 사람들이나 인도의 카시미르 사람들은 전쟁 속에서도 끊임 없이 뭔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들 모두는 그들 나름대로의 위기에 직면하여 있는 그룹들이다. 때문에 이 위기에 맞서서 뭔가 변화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변화되는 환경에 끌려갈 것인가, 스스로 변화를 주도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제거해 낼 수도 있고, 반대로 엉뚱한 처방을 내려 오히려 더욱 헤어나기 어려운 나락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지금 이슬람은 세계 모든 위기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슬람의 기치를 그들의 행위의 명분으로 내걸고 있다. 혹자는 테러리스트들이 이슬람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이슬람 추종자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극단적인 도덕사회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나치게 폭력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도덕적 종교사회의 출현이 현대 21세기에 과연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테러리즘을 지하드라고 미화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의 근거를 코란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의 이슬람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는 이슬람 내부에서도 논란꺼리이다. 마찬가지로 힌두교도 큰 변혁을 겪으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서구인들은 힌두교를 생각하면 구루나 그라놀라들 처럼 속세에서 완전히 떠나 초연하게 도를 닦는 도인들을 연상한다. 그러나 힌두테러리스트 조직도 이슬람의 알카에다 못지 않다. 더욱이 힌두교 사회는 내부에서 그들끼리도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즉 상위 카스트에 속한 이들과 3억이나 된다는 불가촉 천민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이다. 이 갈등은 때로는 폭력적인 양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인도의 일간지들을 보면 달리트들에 대한 린치나 테러 등의 사건 기사가 수시로 올라온다. 단순한 테러도 있고 학살이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비참한 살해 사건들도 있다. 달리트그룹들은 최근 힌두교 자체를 거부하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대개 불교로 개종한다.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힌두교 지도부는 신분제도의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던지, 교리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할 처지이다.
기독교도 변화의 문 앞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다른 종교에 비해서 상황이 훨씬 긍정적인 것은 다행한 일이다. 지난 100년 동안 기독교는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져 있으면서도 종파간의 협력과 공존을 위한 모색이 꾸준히 진행되어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룩해 냈다. 기독교계는 선교라는 하나님의 대 위임을 감당하기 위해 꾸준히 활동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지구상의 2/3 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나름대로의 선교적 성과를 이끌어 냈다. 앞으로도 세계선교를 위한 교회의 역량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많은 열방의 족속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놀라운 성취가 있었다.
사람이 위기의 상황에 놓여 있게 되면 대개는 지혜를 발휘하여 그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해법을 찾아낸다. 우리는 힌두교나 이슬람교계도 현재 스스로가 처해 있는 모순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또 이것을 돕기 위해 일정한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종교와 이웃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성경 속에서 찾아지는 희망과 해법을 그들에게 전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생과 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함으로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기 모순 속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전혀 새로운 승리의 희망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대해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과 음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우물을 파주고, 농업관련 프로젝트 사역을 통해서 식량을 자급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거나 가축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작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지금은 이들 힘없는 제3세계 사람들을 향해 기독교인이 적극적으로 도울 때이다. 또 미국에 지금 막 들어와 문화적 충격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민들을 향해서는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적응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안에서 문화적 충격을 겪고 있는 탈북자자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외에도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변화의 시대에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이 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대사로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21세기의 변화의 시대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절호의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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