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한번도 평화롭지 못했던 땅(1)
한때 페르시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란은 역사적으로 볼 때 평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땅이다. 페르시아인들은 늘 남을 정복하거나 정복을 당하는 피곤한 역사를 되풀이 한 종족이다. 현재의 페르시아인들은 성경이 언급한 바사와 메데, 즉 구페르시아인과 메데스인들이 합쳐지면서 형성된 종족이다. 불행하게도 페르시아인들은 서기 600 년까지는 그들의 손으로 기록한 역사 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물론 이들의 역사는 2,500 년 전부터 기록되어 왔지만 대개는 이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다. 고대 그리스시대의 그리스 역사가들도 페르시아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은 한쪽으로 편향되었을 뿐 아니라 전적으로 신뢰하기도 어려운 내용들이다. 당시 페르시아와 그리스는 최고의 라이벌이었고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페르시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은 분명히 있다. 우선 BC 612년 경 시아싸레스 왕이 앗시리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그 세력을 크게 넓혔다. 또 BC 550년에는 그 다음 왕인 사이루스 대제가 바빌론을 침공했다. 그리하여 BC521년에는 페르시아의 영역이 인더스강에서부터 이집트와 터키까지 확대된다. 이 당시 만들어진 도시들은 페르시아군의 위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바빌론과 앗시리아와는 달리 페르시아제국은 종교와 문화적 다양성을 비교적 존중해 주었다. 성경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사이루스 대제는 바빌론에 있는 유대인 포로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할 정도로 문화와 종교에 관대했다.
당시 페르시아에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전파되는 것은 당연했다.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 선지자는 페르시아 제국의 관료 조직에서 일한 사람이었다. 다니엘 등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들 덕분에 페르시아인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신실한 신앙과 자신의 직무에 대한 성실함으로 존경은 받았지만 그들을 통해 이들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널리 보급되고 기독교인의 수가 불어나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역사 안에서 페르시아인의 지위는 순식간에 정복자에서 피정복민으로 전락한다. BC 323년 경, 알렉산더 황제에 의해 정복을 당한 것이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에 그리스 문화를 이식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서 제우스 신에 대한 숭배를 페르시아인들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페르시아는 다른 종족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해 주기는 했지만, 결코 그것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슬람 말고는 다른 종족의 종교를 받아들인 예는 전무하다.
알렉산더가 BC 312년에 사망하면서 마케도니아왕국은 둘로 쪼개졌다. 두 분단국 모두 알렉산더의 부하 장군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양측이 국경 문제로 다투면서 서로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페르시아처럼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당했던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꾀하게 된다. 우선 페르시아도 독립했다. 그러나 이후 페르시아를 지배했던 왕조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AD208년에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세력인 파르티안 왕조가 붕괴되고 사싸니안 왕조가 성립된다. 사싸니안 시대에 많은 페르시아인들인 네스토리안계의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 정부가 기독교를 공인하던 시절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 즈음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페르시아에서 순교하게 된다.
왜냐면 사싸니아는 로마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사싸니아는 기독교를 탄압하며 로마를 견제했다. 당시 사싸니아는 로마와 국경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후에도 계속된다. 로마 입장에서 보면 사싸니아는 로마의 성장과 확대를 막고 있는 장벽과도 같았다. 이 때문에 로마와 사싸니아는 자주 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었고, 계속되는 전쟁의 결과로 사싸니아의 국력은 쇠락하게 되었다. 물론 사싸니아와 계속 대립하던 동로마의 국력도 크게 약화되었고, 두 나라 모두 정복자들에게 정복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632년 경, 마호멧이 나타나 아라비아 인근의 여러 종족들을 통합하며 강력하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651년 경 강력하게 성장한 아랍은 페르시아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호멧이 창시한 종교인 이슬람도 함께 페르시아로 들어와 뿌리를 내린다. 아랍의 정복을 당한 페르시아는 결코 평화로울 수 없었다. 아랍의 정복의 결과로 페르시아는 전쟁에 오랜 기간 시달리게 된다.
아랍에게만 시달린 것은 아니다. 그후 600 년 쯤 후인 1256년에는 몽골의 영웅 징기즈칸의 손자인 훌라구 칸의 정복을 받는다. 몽골의 세력이 물러간 후에는 타마르란과 터키 유목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이 때가 1393년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배는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이들이 물러가고 페르시아에는 사파비드 왕조가 세워졌다. 이 때는 페르시아가 오랜 외세의 지배에서 오랜만에 벗어난 시기였고, 페르시아 역사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의 특유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러나 사파비드 왕조는 문화적으로는 융성했으나 정치나 군사적으로는 크게 취약한 왕조였다.
한때 페르시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란은 역사적으로 볼 때 평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땅이다. 페르시아인들은 늘 남을 정복하거나 정복을 당하는 피곤한 역사를 되풀이 한 종족이다. 현재의 페르시아인들은 성경이 언급한 바사와 메데, 즉 구페르시아인과 메데스인들이 합쳐지면서 형성된 종족이다. 불행하게도 페르시아인들은 서기 600 년까지는 그들의 손으로 기록한 역사 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물론 이들의 역사는 2,500 년 전부터 기록되어 왔지만 대개는 이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다. 고대 그리스시대의 그리스 역사가들도 페르시아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은 한쪽으로 편향되었을 뿐 아니라 전적으로 신뢰하기도 어려운 내용들이다. 당시 페르시아와 그리스는 최고의 라이벌이었고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페르시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은 분명히 있다. 우선 BC 612년 경 시아싸레스 왕이 앗시리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그 세력을 크게 넓혔다. 또 BC 550년에는 그 다음 왕인 사이루스 대제가 바빌론을 침공했다. 그리하여 BC521년에는 페르시아의 영역이 인더스강에서부터 이집트와 터키까지 확대된다. 이 당시 만들어진 도시들은 페르시아군의 위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바빌론과 앗시리아와는 달리 페르시아제국은 종교와 문화적 다양성을 비교적 존중해 주었다. 성경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사이루스 대제는 바빌론에 있는 유대인 포로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할 정도로 문화와 종교에 관대했다.
당시 페르시아에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전파되는 것은 당연했다.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 선지자는 페르시아 제국의 관료 조직에서 일한 사람이었다. 다니엘 등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들 덕분에 페르시아인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신실한 신앙과 자신의 직무에 대한 성실함으로 존경은 받았지만 그들을 통해 이들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널리 보급되고 기독교인의 수가 불어나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역사 안에서 페르시아인의 지위는 순식간에 정복자에서 피정복민으로 전락한다. BC 323년 경, 알렉산더 황제에 의해 정복을 당한 것이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에 그리스 문화를 이식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서 제우스 신에 대한 숭배를 페르시아인들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페르시아는 다른 종족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해 주기는 했지만, 결코 그것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슬람 말고는 다른 종족의 종교를 받아들인 예는 전무하다.
알렉산더가 BC 312년에 사망하면서 마케도니아왕국은 둘로 쪼개졌다. 두 분단국 모두 알렉산더의 부하 장군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양측이 국경 문제로 다투면서 서로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페르시아처럼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당했던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꾀하게 된다. 우선 페르시아도 독립했다. 그러나 이후 페르시아를 지배했던 왕조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AD208년에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세력인 파르티안 왕조가 붕괴되고 사싸니안 왕조가 성립된다. 사싸니안 시대에 많은 페르시아인들인 네스토리안계의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 정부가 기독교를 공인하던 시절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 즈음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페르시아에서 순교하게 된다.
왜냐면 사싸니아는 로마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사싸니아는 기독교를 탄압하며 로마를 견제했다. 당시 사싸니아는 로마와 국경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후에도 계속된다. 로마 입장에서 보면 사싸니아는 로마의 성장과 확대를 막고 있는 장벽과도 같았다. 이 때문에 로마와 사싸니아는 자주 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었고, 계속되는 전쟁의 결과로 사싸니아의 국력은 쇠락하게 되었다. 물론 사싸니아와 계속 대립하던 동로마의 국력도 크게 약화되었고, 두 나라 모두 정복자들에게 정복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632년 경, 마호멧이 나타나 아라비아 인근의 여러 종족들을 통합하며 강력하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651년 경 강력하게 성장한 아랍은 페르시아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호멧이 창시한 종교인 이슬람도 함께 페르시아로 들어와 뿌리를 내린다. 아랍의 정복을 당한 페르시아는 결코 평화로울 수 없었다. 아랍의 정복의 결과로 페르시아는 전쟁에 오랜 기간 시달리게 된다.
아랍에게만 시달린 것은 아니다. 그후 600 년 쯤 후인 1256년에는 몽골의 영웅 징기즈칸의 손자인 훌라구 칸의 정복을 받는다. 몽골의 세력이 물러간 후에는 타마르란과 터키 유목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이 때가 1393년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배는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이들이 물러가고 페르시아에는 사파비드 왕조가 세워졌다. 이 때는 페르시아가 오랜 외세의 지배에서 오랜만에 벗어난 시기였고, 페르시아 역사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의 특유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러나 사파비드 왕조는 문화적으로는 융성했으나 정치나 군사적으로는 크게 취약한 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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