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한번도 평화롭지 못했던 땅(2)
사파비드 왕조의 몰락 이후 등장한 몇몇 왕조들의 통치력은 매우 취약했고, 이는 유럽 제국주의 세력이 이 곳으로 들어오는 빌미가 되었다. 1800년대 내내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 지역의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1906년에는 이 두 나라가 페르시아를 양분해서 통치하는 지경에 이른다. 즉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영국이 분할통치를 시작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식민지 시대의 역기능도 많았지만 순기능도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민주주의 같은 서구적인 사고방식이 페르시아에 도입된 것도 이 유럽의 지배 기간의 일이다. 1908년, 일련의 혁명과정을 거쳐 페르시아는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식 국호를 이란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이란에 도입은 되었지만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1925년에 발생한 쿠데타로 레자 샤라는 이름의 군장교가 정권을 잡고 이란의 서구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레자 샤 정권은 2차 대전 내내 친독일 성향을 보여주었고 이는 영국과 소련을 불편하게 했다. 그들은 소련에 진주한 독일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이란이 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이들은 더 이상 이러한 친독정권을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41년, 독-영 연합군은 다시한번 이란을 점령하고 샤를 정권에서 축출한 후 그의 아들인 모하마드를 권좌에 앉혔다.
2차대전 이후,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세력과 왕정을 추구하는 세력이 업치락뒤치락해 가면서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경쟁해 갔다. 레자 모하마드는 1954년에 쿠데타 기도를 여러 차례 적발하여 분쇄했고, 이 과정에서 이란의 민주주의는 점점 퇴보해 갔다. 의회는 거수기로 전락했고, 모하마드는 아버지이자 전임자인 샤의 정책을 계승하여 빠른 서구화를 밀어 붙였다. 이러한 무리한 서구화는 그 반발로 친이슬람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은 반대파, 즉 친이슬람세력에 대한 탄압 뿐이었다.
정권의 탄압에 눌려 안으로 끓고 있던 이슬람세력의 힘은 1979년에 강하게 분출되었다. 국왕은 축출되었고 이슬람 정부가 들어섰다. 샤 모하마드에 의해 추방되어 외유하던 이슬람 노성직자인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귀국해 이란의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했고, 이란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혀 다른 질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혁명이 이란 인민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또 다른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이웃나라 이라크는 이란의 영향을 받아 자국에서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1980년, 이라크는 이란을 침공했다. 이 전쟁은 1988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약 50만 명 가량의 이란인이 총과 같은 무기나 독가스 등으로 인해 사망했다. 양측 간에는 끊임 없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 전쟁에 대해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2차 대전 수준의 무기를 가지고 1차 대전 수준의 전면전을 치른 전쟁이라고 묘사했다.
1979년의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은 여러 모로 강경이슬람극단주의가 판을 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일련의 이슬람화가 과연 이란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변화일까? 불행하게도 이란 국민들은 대체적으로 답답한 이슬람사회보다는 세속적인 서구사회를 동경하고 있다. 지금도 이란 안에서는 총성 없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는 극단적인 1979년 이슬람 혁명체제를 유지하려는 종교기득권세력과 다시한번 서구화를 모색하려는 젊은 개혁세력간의 전쟁이다.
이러한 보통 국민들의 갈망은 선교적으로 볼 때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줄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복음을 들을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이란은 선교사들이 상주하며 복음을 전하기 매우 어려운 땅이 되고 말았다. 오퍼레이션 월드가 출판한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이란 내의 기독교인 수는 고작 300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1979 년 이후 비밀리에 신가가 되어 기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확하게 이란의 기독교인이 몇 명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란의 주류종족인 페르시아인과 수많은 소수민족 그룹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민족을 이야기하자면 이란 북서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600 만 명의 쿠르드인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 기독교인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혹시 있다하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쿠르드족 사이에서 선교사역을 벌이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하다. 바로 이웃나라인 이란에는 이라크 내의 쿠르드인들의 독립을 꿈꾸며 활동하는 무장게릴라들이 있다. 이들은 이란의 쿠르드족 지역을 이라크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하고 있다. 이란 내의 아랍족들도 복음의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다. 그들은 유전이 풍부한 서남부 이라크 국경지대에 살고 있다. 남서부의 발로치족들과 그 인근의 여러 유목민들, 소수의 유대인과 조로아스터교인들 그리고 바하이족도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사파비드 왕조의 몰락 이후 등장한 몇몇 왕조들의 통치력은 매우 취약했고, 이는 유럽 제국주의 세력이 이 곳으로 들어오는 빌미가 되었다. 1800년대 내내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 지역의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1906년에는 이 두 나라가 페르시아를 양분해서 통치하는 지경에 이른다. 즉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영국이 분할통치를 시작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식민지 시대의 역기능도 많았지만 순기능도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민주주의 같은 서구적인 사고방식이 페르시아에 도입된 것도 이 유럽의 지배 기간의 일이다. 1908년, 일련의 혁명과정을 거쳐 페르시아는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식 국호를 이란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이란에 도입은 되었지만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1925년에 발생한 쿠데타로 레자 샤라는 이름의 군장교가 정권을 잡고 이란의 서구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레자 샤 정권은 2차 대전 내내 친독일 성향을 보여주었고 이는 영국과 소련을 불편하게 했다. 그들은 소련에 진주한 독일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이란이 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이들은 더 이상 이러한 친독정권을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41년, 독-영 연합군은 다시한번 이란을 점령하고 샤를 정권에서 축출한 후 그의 아들인 모하마드를 권좌에 앉혔다.
2차대전 이후,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세력과 왕정을 추구하는 세력이 업치락뒤치락해 가면서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경쟁해 갔다. 레자 모하마드는 1954년에 쿠데타 기도를 여러 차례 적발하여 분쇄했고, 이 과정에서 이란의 민주주의는 점점 퇴보해 갔다. 의회는 거수기로 전락했고, 모하마드는 아버지이자 전임자인 샤의 정책을 계승하여 빠른 서구화를 밀어 붙였다. 이러한 무리한 서구화는 그 반발로 친이슬람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은 반대파, 즉 친이슬람세력에 대한 탄압 뿐이었다.
정권의 탄압에 눌려 안으로 끓고 있던 이슬람세력의 힘은 1979년에 강하게 분출되었다. 국왕은 축출되었고 이슬람 정부가 들어섰다. 샤 모하마드에 의해 추방되어 외유하던 이슬람 노성직자인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귀국해 이란의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했고, 이란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혀 다른 질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혁명이 이란 인민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또 다른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이웃나라 이라크는 이란의 영향을 받아 자국에서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1980년, 이라크는 이란을 침공했다. 이 전쟁은 1988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약 50만 명 가량의 이란인이 총과 같은 무기나 독가스 등으로 인해 사망했다. 양측 간에는 끊임 없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 전쟁에 대해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2차 대전 수준의 무기를 가지고 1차 대전 수준의 전면전을 치른 전쟁이라고 묘사했다.
1979년의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은 여러 모로 강경이슬람극단주의가 판을 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일련의 이슬람화가 과연 이란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변화일까? 불행하게도 이란 국민들은 대체적으로 답답한 이슬람사회보다는 세속적인 서구사회를 동경하고 있다. 지금도 이란 안에서는 총성 없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는 극단적인 1979년 이슬람 혁명체제를 유지하려는 종교기득권세력과 다시한번 서구화를 모색하려는 젊은 개혁세력간의 전쟁이다.
이러한 보통 국민들의 갈망은 선교적으로 볼 때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줄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복음을 들을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이란은 선교사들이 상주하며 복음을 전하기 매우 어려운 땅이 되고 말았다. 오퍼레이션 월드가 출판한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이란 내의 기독교인 수는 고작 300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1979 년 이후 비밀리에 신가가 되어 기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확하게 이란의 기독교인이 몇 명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란의 주류종족인 페르시아인과 수많은 소수민족 그룹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민족을 이야기하자면 이란 북서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600 만 명의 쿠르드인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 기독교인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혹시 있다하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쿠르드족 사이에서 선교사역을 벌이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하다. 바로 이웃나라인 이란에는 이라크 내의 쿠르드인들의 독립을 꿈꾸며 활동하는 무장게릴라들이 있다. 이들은 이란의 쿠르드족 지역을 이라크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하고 있다. 이란 내의 아랍족들도 복음의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다. 그들은 유전이 풍부한 서남부 이라크 국경지대에 살고 있다. 남서부의 발로치족들과 그 인근의 여러 유목민들, 소수의 유대인과 조로아스터교인들 그리고 바하이족도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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