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베르베르족 거주지, 신사도행전의 현장
알제리를 방문하는 외국인들 가운데 아랍어나, 베르베르어, 심지어 한때 이 나라를 식민통치했기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언어인 프랑스어 가운데 하나도 구사할수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여성이고, 언론인이고, 미국인이나 영국인이고, 기독교인이라면 반미, 반기독교 감정이 심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분명히 있을 알제리를 혼자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알제리에 취재차 다녀온 영국의 여성 기독언론인인 데보라 메로프는 한마디로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말한다. 공항에서 수하물 벨트에서 짐을 찾는 과정에서부터 친절하게 미소를 머금고 영어까지 할 줄 아는 현지인 여행객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니 첫인상이 괜찮았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취재 여행 과정에서는 알제리 계열의 기독교인 통역을 늘 대동했다. 다음의 내용은 그의 취재기이다.
지난 20년 간 나는 세계 94개국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하여 보도해 왔다. 알제리에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알제리는 지중해와 연하여 있는 신비스런 나라이다. 내가 알제리를 방문한 것은 알제리에서 이슬람의 명백한 장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교회 개척사역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실제로 보고 취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통역을 맡았던 다비도 4개국어에 능통한 알제리인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나와 동행하는 동안에 자신이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를 간증하여 준 훌륭한 취재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대학에 다닐 때 라디오 몬테카를로 라는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기독교 음악을 즐겨 들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방송국에 기독교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 편지를 보냈고, 방송국 측은 복음서와 몇몇 자료들을 보내주었다. 그는 특히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에 크게 매료되었다.
“나는 이슬람 경전의 어디에서도 그런 구절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코란과 인질(알제리 언어로 신약성경)의 가장 큰 차이다. 복음 안에서는 사람이 신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사람은 철저하게 신의 노예이다. 또 내가 예수를 따르기로 한 가장 큰 원인은 그 분은 그 분이 가르치신 대로 실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하나님과 친구되게 하셨다.”라고 다비는 고백했다. 내가 만난 또 다른 젊은 신자는 “나는 이슬람 신자는 결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다비 주변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료 신자가 한참 동안이나 없었다. 그가 알제리 사람들 중에서 또 다른 신자를 만나 알게 된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 된 후 12년이나 지난 뒤였다.
나는 알제리에 도착한 뒤 며칠을 희망의 집(House 0f Hope)이라는 곳에서 보냈다. 그곳은 전략적인 선교를 위한 선교센터로 한 알제리인 기독교인에 의해 8년 전에 세워졌다. 이 센터의 목표는 교회의 설립과 성장을 돕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복음 전파와 훈련을 위한 자료를 공급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워낙 신자 수가 드문데다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어 서로 만나기조차 어려운 성도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형성해주고 교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알리와 릴리는 부부로 모두 밝은 모습으로 이 센터에서 봉사하는 일꾼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는 이슬람 신자였으나 기독교 계통의 TV방송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제는 이 방송의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실제로 이 방송이 광고 가운데 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연락하라며 내보내는 전화번호는 알리의 핸드폰 번호이다. 사실 이는 매우 위험한 노출이다. 실제로 알리는 복음에 관심을 표명하는 전화보다는 욕설 전화를 더 많이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어느 날 새벽에 받았던 전화를 잊지 못한다. 어느 날 새벽 6시쯤 받은 전화에서,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이 1999년부터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간절히 알리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는 TV화면에서 알리의 전화를 보기 전까지 자신은 알제리에 기독교인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알제리의 교회들은 알제리의 특성상 금요일에 예배가 있다. 이슬람 사회는 금요일에 이슬람 예배가 있는 반면 주일은 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부득이한 현상이다. 나도 이들의 예배에 참석해 보았다.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예배는 이들이 사용하는 3개 언어가 뒤섞인 참 재미있고 열정적인 예배였다. 예배의 마지막에 각자의 간증이 있었다. 한 아랍인은 자신은 바로 며칠 전에 TV를 통해 복음을 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며칠 안된 신자라고 고백했다. 또 다른 젊은이도 자신이 얼마 안된 신자라고 고백하면서 “나는 이슬람 신자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알제리인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할 대가가 워낙 크기 때문에 알제리에는 기독교인들이 매우 적다. 기독교인들은 구타와 폭력을 당하기 일쑤이고, 집과 직장을 잃기도 한다. 심지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담대히 간증하는 그들의 모습과 표정은 그것이 그대로 감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나날이 늘어가는 모습은 마치 사도행전의 한 페이지를 보는 듯했다. 내가 만난 또 다른 한 커플은 철저한 이슬람 신자였고, 반미주의자였다. 그런데 그는 재미있는 간증을 했다. 자신은 코란을 통해 예수를 만났다는 것이다. 코란도 예수를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자신은 수많은 선지자들 가운데 하필 예수에 흥미를 느껴 그분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다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이슬람 신자시절부터 좋아했다. 그 때부터 나는 알라신께서 마호멧 선지자와 예수 사이에서 선택권을 주신다면 예수를 더 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시작이 되어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되고 어느 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환상을 통해 예수님이야 말로 진짜 신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내 마음을 정했다.” 그는 그야말로 사랑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에게 더 이상의 증오는 없었다. 지금 그는 알제리 내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아랍족과 카빌레족 사이의 화해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알제리의 교회의 90%는 북동부 산악지역에 있다. 이 지역은 카빌리아라고 불리는 지역이고, 카빌레족이 사는 지역이다. 알제리의 인구는 3500 만 명 정도이다. 이 나라는 크게 두 인종그룹으로 나뉜다. 고대로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던 원주민들이 훗날 이슬람 아랍족에 의해 점령 당했다. 지금에 와서는 아랍계 주민들이 베르베르계 주민의 다섯 배나 될 정도로 아랍족이 주류가 되었다.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카빌레족은 아랍의 정복자들과는 역사적으로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이들 두 종족 그룹의 적대감은 프랑스가 알제리를 독립시키고 물러간 1962년 이후 다시 표면으로 드러나 격화되었다. 아랍계 정부는 알제리 전체의 단결을 명분으로 단일국가, 단일종교, 단일문화, 단일언어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반면 베르베르족은 이제는 그 흔적조차 희미해졌지만 아랍인들의 정복을 당하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믿던 종족이었다. 때문에 이제는 이슬람교를 믿고 있지만 이슬람에 대한 충성도는 아랍인들만큼 강하지는 않다. 실제로 베르베르족은 이슬람교를 믿으면서도 돼지고기도 먹고 맥주도 마신다. 그러자 정부는 아랍인들을 베르베르족 거주지역으로 이주시켜 베르베르족 사회에 모스크를 짓게 하고 베르베르인들의 신앙지도자로 군림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정부는 1980년 들어서 그간 주장해 왔던 대로 아랍어를 알제리의 유일한 공용어로 인정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또 베르베르의 문화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은 살해되고 많은 대학생들이 시위 중에 사망했다.
그러나 끈질긴 투쟁의 결과로 아랍어만을 공용어로 하는 정책은 2002년에 폐지되고 베르베르어도 공용어로 추가되었다. 어쨌든 카빌레족은 아랍인들과 모든 면에서 대립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반감은 카빌레족 사이의 기독교 부흥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1990년대에 활약하면서 수천 카피의 예수영화 필름과 복음자료를 배포했던 찰스 마르쉬 선교사 등의 활약이 뒤늦게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알제리 교회의 부흥의 중심지역들을 돌아보면서 카빌리아 지역은 마치 다른 나라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랍인들이 사는 다른 지역과는 확실히 달랐다. 알제리의 대부분이 사막지역인데 비해 이들의 지역은 녹지도 상당히 있었다. 돼지를 키우고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자스민향이 느껴졌다. 이 지역의 중심 도시인 티지 오우조의 거리에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는 알제리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남성들이 대부분 전통적인 아랍의상을 입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일부 여성들은 알제리족들과 마찬가지로 우중충하고 더워 보이는 베일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형형색색으로 수놓아진 드레스나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패스트 푸드 레스토랑과 인터넷 카페(PC방)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위성수신안테나들이 지붕 위의 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실제로 카빌리아의 교회들 가운데는 매일 저녁마다 틈틈이 모여 함께 기도하며, 비전을 나누며, 위로하는 모습이 흔하다. 그들 가운데는 전직 테러리스트도 있고 이슬람 지도자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카빌리아지역만 보면 알제리 교회는 사상 유래 없는 영적 부흥을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도 있다. 베르베르어 성경이 충분히 보급되어 있지 못하다 보니 교회가 말씀 위에 든든하고 바로 서지 못한다. 또 교회의 지도자들의 훈련과 교육수준이 매우 낮다. 이는 교회가 언제라도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음을 뜻한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함께 적절한 훈련과 교육이 병행된다면 카빌리아 지역의 교회는 알제리와 북아프리카를 위해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교회이다.
이제 알제리의 기독교인의 수는 4만을 넘기고 있다. 한 알제리 교회의 지도자는 “알제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새로운 때를 맞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훗날 교회사는 이를 큰 오점으로 기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환경은 매우 좋다. 위성 라디오와 TV를 통해, 그리고 환상과 꿈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곳 사람들을 강하게 불러 모으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이 카빌레 계열의 사람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고 다수의 아랍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에는 2%가 부족하다.
알제리를 방문하는 외국인들 가운데 아랍어나, 베르베르어, 심지어 한때 이 나라를 식민통치했기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언어인 프랑스어 가운데 하나도 구사할수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여성이고, 언론인이고, 미국인이나 영국인이고, 기독교인이라면 반미, 반기독교 감정이 심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분명히 있을 알제리를 혼자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알제리에 취재차 다녀온 영국의 여성 기독언론인인 데보라 메로프는 한마디로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말한다. 공항에서 수하물 벨트에서 짐을 찾는 과정에서부터 친절하게 미소를 머금고 영어까지 할 줄 아는 현지인 여행객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니 첫인상이 괜찮았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취재 여행 과정에서는 알제리 계열의 기독교인 통역을 늘 대동했다. 다음의 내용은 그의 취재기이다.
지난 20년 간 나는 세계 94개국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하여 보도해 왔다. 알제리에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알제리는 지중해와 연하여 있는 신비스런 나라이다. 내가 알제리를 방문한 것은 알제리에서 이슬람의 명백한 장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교회 개척사역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실제로 보고 취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통역을 맡았던 다비도 4개국어에 능통한 알제리인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나와 동행하는 동안에 자신이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를 간증하여 준 훌륭한 취재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대학에 다닐 때 라디오 몬테카를로 라는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기독교 음악을 즐겨 들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방송국에 기독교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 편지를 보냈고, 방송국 측은 복음서와 몇몇 자료들을 보내주었다. 그는 특히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에 크게 매료되었다.
“나는 이슬람 경전의 어디에서도 그런 구절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코란과 인질(알제리 언어로 신약성경)의 가장 큰 차이다. 복음 안에서는 사람이 신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사람은 철저하게 신의 노예이다. 또 내가 예수를 따르기로 한 가장 큰 원인은 그 분은 그 분이 가르치신 대로 실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하나님과 친구되게 하셨다.”라고 다비는 고백했다. 내가 만난 또 다른 젊은 신자는 “나는 이슬람 신자는 결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다비 주변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료 신자가 한참 동안이나 없었다. 그가 알제리 사람들 중에서 또 다른 신자를 만나 알게 된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 된 후 12년이나 지난 뒤였다.
나는 알제리에 도착한 뒤 며칠을 희망의 집(House 0f Hope)이라는 곳에서 보냈다. 그곳은 전략적인 선교를 위한 선교센터로 한 알제리인 기독교인에 의해 8년 전에 세워졌다. 이 센터의 목표는 교회의 설립과 성장을 돕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복음 전파와 훈련을 위한 자료를 공급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워낙 신자 수가 드문데다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어 서로 만나기조차 어려운 성도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형성해주고 교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알리와 릴리는 부부로 모두 밝은 모습으로 이 센터에서 봉사하는 일꾼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는 이슬람 신자였으나 기독교 계통의 TV방송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제는 이 방송의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실제로 이 방송이 광고 가운데 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연락하라며 내보내는 전화번호는 알리의 핸드폰 번호이다. 사실 이는 매우 위험한 노출이다. 실제로 알리는 복음에 관심을 표명하는 전화보다는 욕설 전화를 더 많이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어느 날 새벽에 받았던 전화를 잊지 못한다. 어느 날 새벽 6시쯤 받은 전화에서,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이 1999년부터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간절히 알리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는 TV화면에서 알리의 전화를 보기 전까지 자신은 알제리에 기독교인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알제리의 교회들은 알제리의 특성상 금요일에 예배가 있다. 이슬람 사회는 금요일에 이슬람 예배가 있는 반면 주일은 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부득이한 현상이다. 나도 이들의 예배에 참석해 보았다.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예배는 이들이 사용하는 3개 언어가 뒤섞인 참 재미있고 열정적인 예배였다. 예배의 마지막에 각자의 간증이 있었다. 한 아랍인은 자신은 바로 며칠 전에 TV를 통해 복음을 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며칠 안된 신자라고 고백했다. 또 다른 젊은이도 자신이 얼마 안된 신자라고 고백하면서 “나는 이슬람 신자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알제리인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할 대가가 워낙 크기 때문에 알제리에는 기독교인들이 매우 적다. 기독교인들은 구타와 폭력을 당하기 일쑤이고, 집과 직장을 잃기도 한다. 심지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담대히 간증하는 그들의 모습과 표정은 그것이 그대로 감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나날이 늘어가는 모습은 마치 사도행전의 한 페이지를 보는 듯했다. 내가 만난 또 다른 한 커플은 철저한 이슬람 신자였고, 반미주의자였다. 그런데 그는 재미있는 간증을 했다. 자신은 코란을 통해 예수를 만났다는 것이다. 코란도 예수를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자신은 수많은 선지자들 가운데 하필 예수에 흥미를 느껴 그분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다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이슬람 신자시절부터 좋아했다. 그 때부터 나는 알라신께서 마호멧 선지자와 예수 사이에서 선택권을 주신다면 예수를 더 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시작이 되어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되고 어느 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환상을 통해 예수님이야 말로 진짜 신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내 마음을 정했다.” 그는 그야말로 사랑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에게 더 이상의 증오는 없었다. 지금 그는 알제리 내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아랍족과 카빌레족 사이의 화해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알제리의 교회의 90%는 북동부 산악지역에 있다. 이 지역은 카빌리아라고 불리는 지역이고, 카빌레족이 사는 지역이다. 알제리의 인구는 3500 만 명 정도이다. 이 나라는 크게 두 인종그룹으로 나뉜다. 고대로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던 원주민들이 훗날 이슬람 아랍족에 의해 점령 당했다. 지금에 와서는 아랍계 주민들이 베르베르계 주민의 다섯 배나 될 정도로 아랍족이 주류가 되었다.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카빌레족은 아랍의 정복자들과는 역사적으로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이들 두 종족 그룹의 적대감은 프랑스가 알제리를 독립시키고 물러간 1962년 이후 다시 표면으로 드러나 격화되었다. 아랍계 정부는 알제리 전체의 단결을 명분으로 단일국가, 단일종교, 단일문화, 단일언어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반면 베르베르족은 이제는 그 흔적조차 희미해졌지만 아랍인들의 정복을 당하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믿던 종족이었다. 때문에 이제는 이슬람교를 믿고 있지만 이슬람에 대한 충성도는 아랍인들만큼 강하지는 않다. 실제로 베르베르족은 이슬람교를 믿으면서도 돼지고기도 먹고 맥주도 마신다. 그러자 정부는 아랍인들을 베르베르족 거주지역으로 이주시켜 베르베르족 사회에 모스크를 짓게 하고 베르베르인들의 신앙지도자로 군림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정부는 1980년 들어서 그간 주장해 왔던 대로 아랍어를 알제리의 유일한 공용어로 인정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또 베르베르의 문화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은 살해되고 많은 대학생들이 시위 중에 사망했다.
그러나 끈질긴 투쟁의 결과로 아랍어만을 공용어로 하는 정책은 2002년에 폐지되고 베르베르어도 공용어로 추가되었다. 어쨌든 카빌레족은 아랍인들과 모든 면에서 대립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반감은 카빌레족 사이의 기독교 부흥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1990년대에 활약하면서 수천 카피의 예수영화 필름과 복음자료를 배포했던 찰스 마르쉬 선교사 등의 활약이 뒤늦게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알제리 교회의 부흥의 중심지역들을 돌아보면서 카빌리아 지역은 마치 다른 나라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랍인들이 사는 다른 지역과는 확실히 달랐다. 알제리의 대부분이 사막지역인데 비해 이들의 지역은 녹지도 상당히 있었다. 돼지를 키우고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자스민향이 느껴졌다. 이 지역의 중심 도시인 티지 오우조의 거리에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는 알제리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남성들이 대부분 전통적인 아랍의상을 입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일부 여성들은 알제리족들과 마찬가지로 우중충하고 더워 보이는 베일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형형색색으로 수놓아진 드레스나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패스트 푸드 레스토랑과 인터넷 카페(PC방)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위성수신안테나들이 지붕 위의 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실제로 카빌리아의 교회들 가운데는 매일 저녁마다 틈틈이 모여 함께 기도하며, 비전을 나누며, 위로하는 모습이 흔하다. 그들 가운데는 전직 테러리스트도 있고 이슬람 지도자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카빌리아지역만 보면 알제리 교회는 사상 유래 없는 영적 부흥을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도 있다. 베르베르어 성경이 충분히 보급되어 있지 못하다 보니 교회가 말씀 위에 든든하고 바로 서지 못한다. 또 교회의 지도자들의 훈련과 교육수준이 매우 낮다. 이는 교회가 언제라도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음을 뜻한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함께 적절한 훈련과 교육이 병행된다면 카빌리아 지역의 교회는 알제리와 북아프리카를 위해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교회이다.
이제 알제리의 기독교인의 수는 4만을 넘기고 있다. 한 알제리 교회의 지도자는 “알제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새로운 때를 맞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훗날 교회사는 이를 큰 오점으로 기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환경은 매우 좋다. 위성 라디오와 TV를 통해, 그리고 환상과 꿈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곳 사람들을 강하게 불러 모으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이 카빌레 계열의 사람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고 다수의 아랍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에는 2%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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