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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뉴스/레바논

레바논, 제마엘장관 피살 이후의 기독교계 위축 / 2006-12-05

레바논, 제마엘장관 피살 이후의 기독교계 위축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북쪽에 있는 비크바야는 레바논에서도 기독교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다고 고지대에 만들어진 도시이다.  이곳 주민들은 최근 많은 이들로부터 애정과 존경을 받던 정치지도자인 피에레 제마엘의 피살로 인해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다.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제마엘의 사망도 사망이지만 그의 죽음 이후 자신들의 장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자칫 내전에 휩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시아파 이슬람 신자들은 거침이 없다.  게다가 상당한 무장을 하고 있다.  반면 기독교계 주민들과 순니계 이슬람 신자들은 계속해서 한쪽 코너로 몰리고 있다."라고 챠벨 타노우리는 말한다.  그는 1975년부터 1990년 사이의 내전 당시 팔랑헤당 측의 무장세력의 일원으로 내전에 참전했고, 지금은 빵집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가담했던 팔랑헤당은 한 때 상당한 세력을 떨쳤던 기독교계 정당이자 무장세력이었다.

지난 1일, 한쪽으로 레바논 병사들이 도열한 가운데 수많은 추모객들이 제마엘 가문의 석조 저택의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피에레 제마엘은 올해 34세의 젊은 나이에 레바논 산업장관으로 재직 중이었으며 팔랑헤당의 당수이기도 했지만, 지난 주에 피격 당했다.  제마엘의 사망은 레바논 독립 이후 레바논에서 상당한 정치적 사회적 비중을 차지해 온 기독교계 주민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다종교 국가이지만 세력이나 숫적으로 기독교계가 우위를 점하여 주도권을 유지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전후 지금까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양대축으로 유지되어 오던 레바논이 앞으로는 시아파 이슬람과 순니파 이슬람을 양대 축으로 유지될 것이고 기독교계는 소수파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근 제마엘 장관의 피살에서 보듯이 레바논은 최근 2년 동안 크고 작은 정치테러와 폭탄테러, 암살 등에 시달려 왔다.  그동안 일어난 폭탄테러 사건은 하나도 예외 없이 기독교계 주민들을 표적으로 저질러졌다.  암살 사건도 두 건이 있었는데 모두 기독교계 정치인과 언론인이 표적이 되었다.  레바논의 종파 분쟁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이러한 암살과 테러는 각 당사자들로 하여금 더욱더 극단으로 치닫도록 했었다.

또한 상황에 대한 대응 방안을 놓고 기독교계 안에서도 노선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레바논의 주요 정치 세력과 정당은 대개 종교적인 차이를 기반으로 형성되고 있다.  즉 정통 기독교에서 상당히 벗어나기는 했지만 넓게 보아서 기독교라고 분류되는 마론파 기독교가 그 한 축이고, 역시 이슬람교에서는 상당히 벗어나기는 했지만 넓게 보아서 이슬람이라고 분류되는 드루즈파가 정치의 주축을 이루고 있고, 남부와 베카 계곡 등지에서는 시아파 이슬람 세력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또 해안지대를 중심으로해서는 순니계가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신자들의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레바논은 1943년에 독립했다.  이 때부터 마론파 기독교계는 정치적인 지배세력으로 떠올랐고, 이는 이슬람계열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양측간의 내전으로 이어졌고, 1990년의 내전 종료 이후 시아파 이슬람 무장세력인 헤즈볼라 측에게도 어느 정도의 정치적 지분이 주어 졌다.  반면 전후 시리아군이 레바논의 사회질서의 유지를 돕는다는 명분하에 진주하여 절반쯤 신탁통치를 했고, 이 와중에서 기독교계의 입지는 크게 줄어 들었다.

작년에 발생한 헤즈볼라 측의 지도자인 하리리 총리의 암살을 계기로 시리아군이 철군하자 기독교계는 정치적인 회생의 전기를  맞는 듯했다.  그러나 우여 곡절을 거쳐 레바논의 정국은 시아파 이슬람과 순니파 이슬람의 양대 축으로 개편되고 있고, 기독교계의 정치적인 부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입지가 크게 축소되는 것에 대해 기독교계는  크게 당황하고 있다.

이후 기독교계의 정치 지도자인 제마엘 측은 시리아군 세력의 철군과 축출을 명분으로 순니계와 드루즈계와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이 연합전선은 3월 14일에 결성되었다하여 314 동맹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결과로 대표적인 강력한 반시리아 레바논민족주의자로 알려진 아운 같은 사람은 지난 총선에서 기독교인들의 표의 70%를 득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지지는 이내 시들고 말았다.  그가 헤즈볼라와 정치적 타헙을 하는 기운을 보이자 순니, 드루즈, 기독교 간의 연합세력은 그를 배척해 버리고 내각에서도 축출한 것이다.

아운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대권의 야망을 품고 시아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치적 야합을 했다고 주장한다.  혹자들은 순니, 드루즈, 기독교간 연합세력이 그를 소외시키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헤즈볼라를 끌어 안은 것이라고 분석한다.  어찌되었던 이를 계기로 아운은 연합세력과는 완전히 물과 기름처럼 되어 버렸다.  피살된 피에레 제마엘의 부친인 아민 제마엘은 아운이 피에레 제마엘을 조문 하는 것조차 불허했다.  헤즈볼라의 지도자인 세이크 핫산 나스랄라의 조문을 허용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314동맹과 아운 측과의 분열은 지난 주의 제마엘 추모시위에서도 드러났다.  제마엘의 지지자들은 아운의 초상화를 불태웠고, 그를 시리아와 이란의 동맹자라고 비난했다.  시리아와 이란은 헤즈볼라의 뒤를 받쳐주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처럼 레바논을 구성하고 있는 각 종교계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화해하기도 서로 용납하기도, 상대의 존재를 인정해 주기도 힘든 구조적인 위기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게다가 아운과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하는 시아파가 강력하게 부상하면서 기독교계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고 있고, 이는 기독교계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실적인 위험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