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카스트 사회의 부작용(1)
스티븐 푸치스는 자신의 저서인 "인도의 하부 사회에 대해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주인이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도 계급의 제도가 반드시 지켜진다. 즉 음식을 제공하는 주인은 손님과 비교해서 카스트상으로 같거나 높은 계급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인도인들은 자신보다 낮은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 주는 음식은 손도 안댄다는 말과 같다. 인도인들은 이처럼 사람을 사귀고 만나는 것도 신분을 봐가면서 가려서 만나고 상대해서는 안되는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어쩌면 카스트제도가 지금까지 유지된 근간일 것이다. 이러한 결벽적인 신분제도 때문에 생기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뭄바이시의 크고 작은 기업의 사무직을 점하고 있는 고위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은 점심 식사때면 고민이 크다. 밖에 나가서 사먹자니 자신보다 같거나 높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우 부인은 매일 점심 도시락을 챙겨 싸주어야하고, 남편은 매일 도시락을 들고 출퇴근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따듯한 점심식사를 하려면 부인이 직접 만든 도시락을 택배를 통해서 점심시간 즈음에 전달 받아야 하니 택배비용 또한 만만하지 않다. 즉 음식을 먹을 때도 얼마나 맛있고, 영양가 있는 것을 먹느냐 하는 것 못지 않게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해 지는 것이다.
힌두의 카스트 전통에 따라 존재하는 계급은 계급별로 각기 사회적 역할이 다르게 정해진다.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은 힌두교 성직자나 학자 그룹을 형성하며, 다음 계층인 크샤트리야는 군인이나 정치, 혹은 공직 등에 주로 진출하는 그룹이다. 세 번째로 바이쉬나는 주로 사업가 혹은 공상업에 종사하는 그룹이다. 슈드라는 천한 일에 종사하는 계급이다. 인도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던 1948년부터 공식적으로 카스트제도를 폐지했다. 그러나 수천 년 간의 전통이 정부가 폐지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씩 계층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교류도 조금씩 많아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카스트 제도는 힌두 인도 사회를 떠받치는 기반인 것은 분명하다.
이 모든 계층들 가운데 이 글에서는 두 번째 계층인 크샤트리아 계층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크샤트리야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군인들이 많았다. 때문에 카스트 제도가 현대 인도 군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 있는 일이다. 군대 역시 계급사회이기 때문에 카스트제도 상의 계급과 군대 내의 계급이 엇갈려 발생하는 문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엄연한 군대 내의 계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트상의 계급을 더 중시 여기면서 군대 안의 엄격해야 할 규율이 흐려지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고 있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인도군의 전력 손실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전력 약화 현상은 현대 인도군이 창군되던 독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한 고질적인 문제이다. 또 이와 같은 문제는 현대 인도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BC326년에 알렉산더대왕이 이끄는 그리스군이 인도를 침공했을 때도 인도군은 계급제도와 군대 내의 계급의 충돌로 인해 제대로된 명령계통이 작동하지 않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당시 알렉산더와 인도군은 페르시아에서 조우했다. 당시 인도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 페르시아군의 일원으로 알레산더와 맞서야 했다. 처음 맞선 곳은 지금의 라왈핀디 인근의 탁씰라 라는 곳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인도 사람들이 점유하던 땅이었는데 이 땅의 영주는 알렉산더 대군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항복을 하고 자신의 군대 2만 명을 알렉산더 군에 귀속시켰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원래 데리고 온 1만 1천 명의 군대에 새롭게 2만 명을 받아들여 3만 1천 명으로 휘하의 군사가 불어났다. 알렉산더는 또 이같은 영주의 뜻을 존중하여 그가 점유하는 영역에 대한 보호조치도 취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알렉산더의 3만 대군은 페르시아로 진격해 들어가 페르시아의 에릭스 장군이 이끄는 군대와 조우하였다. 에릭스 장군의 휘하에도 인도군이 있었다. 그런데 인도군이 평소에도 에릭스 장군과 페르시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에릭스를 죽이고 알렉산더에게 투항했다. 그들은 에릭스의 머리를 잘라 알렉산더에게 바쳤다. 그런데 이처럼 인도군이 두 차례에 걸쳐 알렉산더에게 스스로 항복하고 투항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인도군 내에 존재하는 카스트 제도 상의 계급과 군대 내의 계급과의 충돌로 인해 명령계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싸움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시간은 그로부터 한참 더 흘러 1700 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 때 인도는 700년째 이슬람 세력의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영국이 인도의 일부를 통치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영국 식민통치세력은 인도인들로 군대를 만들어 인도 지역을 방어하겠다는 목적으로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카스트 제도로 인해 강력하고 응집력 있는 인도군을 구성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군도 카스트제도가 영국군의 기동성과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계급간의 은근한 반목과 상위계급에 의한 하위계급에 대한 부당한 대우 등은 인도 사회의 일상이었다. 때문에 군대 내의 또 다른 계급은 이러한 갈등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이러한 갈등구조는 필연적으로 군인들로하여금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쉽게 적에게 투항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인도의 계급사회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인도를 위협하면서 영국과 대항할 인도군을 모집하자 인도군이 대거 일본에 투항했던 사례가 있다.
그래서 영국도 힌두교의 전통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크샤트리야 계급을 중심으로 군대를 구성했다. 계급제도를 혐오하는 영국의 생리에는 맞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은 또 시크교를 믿는 펀잡족이 전통적으로 매우 호전적이고 강한 군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별도로 이들을 중심으로 한 구르카스 라는 군대를 따로 조직하였다. 결국 카스트제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영국도 현장에서는 카스트 제도의 영향력을 어쩌지 못했던 대표적인 사례이다. 어쨌든 크샤트리야 계급은 전통적으로 인도의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군인으로만 일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농사를 짓는다. 크샤트리야 계층의 농부들은 대개 독립성이 강하고, 민첨하고 힘이 좋고,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들이다. 일부는 땅을 직접소유하고 있고, 일부는 다른 세력들과 격리된 채 농업과 유목을 병행하기도 한다. 특히 자트족은 매우 탁월하고 부유한 농부일 뿐 아니라, 훌륭한 군인들이기도 하다.
스티븐 푸치스는 자신의 저서인 "인도의 하부 사회에 대해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주인이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도 계급의 제도가 반드시 지켜진다. 즉 음식을 제공하는 주인은 손님과 비교해서 카스트상으로 같거나 높은 계급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인도인들은 자신보다 낮은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 주는 음식은 손도 안댄다는 말과 같다. 인도인들은 이처럼 사람을 사귀고 만나는 것도 신분을 봐가면서 가려서 만나고 상대해서는 안되는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어쩌면 카스트제도가 지금까지 유지된 근간일 것이다. 이러한 결벽적인 신분제도 때문에 생기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뭄바이시의 크고 작은 기업의 사무직을 점하고 있는 고위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은 점심 식사때면 고민이 크다. 밖에 나가서 사먹자니 자신보다 같거나 높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우 부인은 매일 점심 도시락을 챙겨 싸주어야하고, 남편은 매일 도시락을 들고 출퇴근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따듯한 점심식사를 하려면 부인이 직접 만든 도시락을 택배를 통해서 점심시간 즈음에 전달 받아야 하니 택배비용 또한 만만하지 않다. 즉 음식을 먹을 때도 얼마나 맛있고, 영양가 있는 것을 먹느냐 하는 것 못지 않게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해 지는 것이다.
힌두의 카스트 전통에 따라 존재하는 계급은 계급별로 각기 사회적 역할이 다르게 정해진다.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은 힌두교 성직자나 학자 그룹을 형성하며, 다음 계층인 크샤트리야는 군인이나 정치, 혹은 공직 등에 주로 진출하는 그룹이다. 세 번째로 바이쉬나는 주로 사업가 혹은 공상업에 종사하는 그룹이다. 슈드라는 천한 일에 종사하는 계급이다. 인도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던 1948년부터 공식적으로 카스트제도를 폐지했다. 그러나 수천 년 간의 전통이 정부가 폐지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씩 계층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교류도 조금씩 많아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카스트 제도는 힌두 인도 사회를 떠받치는 기반인 것은 분명하다.
이 모든 계층들 가운데 이 글에서는 두 번째 계층인 크샤트리아 계층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크샤트리야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군인들이 많았다. 때문에 카스트 제도가 현대 인도 군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 있는 일이다. 군대 역시 계급사회이기 때문에 카스트제도 상의 계급과 군대 내의 계급이 엇갈려 발생하는 문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엄연한 군대 내의 계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트상의 계급을 더 중시 여기면서 군대 안의 엄격해야 할 규율이 흐려지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고 있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인도군의 전력 손실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전력 약화 현상은 현대 인도군이 창군되던 독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한 고질적인 문제이다. 또 이와 같은 문제는 현대 인도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BC326년에 알렉산더대왕이 이끄는 그리스군이 인도를 침공했을 때도 인도군은 계급제도와 군대 내의 계급의 충돌로 인해 제대로된 명령계통이 작동하지 않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당시 알렉산더와 인도군은 페르시아에서 조우했다. 당시 인도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 페르시아군의 일원으로 알레산더와 맞서야 했다. 처음 맞선 곳은 지금의 라왈핀디 인근의 탁씰라 라는 곳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인도 사람들이 점유하던 땅이었는데 이 땅의 영주는 알렉산더 대군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항복을 하고 자신의 군대 2만 명을 알렉산더 군에 귀속시켰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원래 데리고 온 1만 1천 명의 군대에 새롭게 2만 명을 받아들여 3만 1천 명으로 휘하의 군사가 불어났다. 알렉산더는 또 이같은 영주의 뜻을 존중하여 그가 점유하는 영역에 대한 보호조치도 취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알렉산더의 3만 대군은 페르시아로 진격해 들어가 페르시아의 에릭스 장군이 이끄는 군대와 조우하였다. 에릭스 장군의 휘하에도 인도군이 있었다. 그런데 인도군이 평소에도 에릭스 장군과 페르시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에릭스를 죽이고 알렉산더에게 투항했다. 그들은 에릭스의 머리를 잘라 알렉산더에게 바쳤다. 그런데 이처럼 인도군이 두 차례에 걸쳐 알렉산더에게 스스로 항복하고 투항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인도군 내에 존재하는 카스트 제도 상의 계급과 군대 내의 계급과의 충돌로 인해 명령계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싸움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시간은 그로부터 한참 더 흘러 1700 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 때 인도는 700년째 이슬람 세력의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영국이 인도의 일부를 통치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영국 식민통치세력은 인도인들로 군대를 만들어 인도 지역을 방어하겠다는 목적으로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카스트 제도로 인해 강력하고 응집력 있는 인도군을 구성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군도 카스트제도가 영국군의 기동성과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계급간의 은근한 반목과 상위계급에 의한 하위계급에 대한 부당한 대우 등은 인도 사회의 일상이었다. 때문에 군대 내의 또 다른 계급은 이러한 갈등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이러한 갈등구조는 필연적으로 군인들로하여금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쉽게 적에게 투항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인도의 계급사회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인도를 위협하면서 영국과 대항할 인도군을 모집하자 인도군이 대거 일본에 투항했던 사례가 있다.
그래서 영국도 힌두교의 전통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크샤트리야 계급을 중심으로 군대를 구성했다. 계급제도를 혐오하는 영국의 생리에는 맞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은 또 시크교를 믿는 펀잡족이 전통적으로 매우 호전적이고 강한 군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별도로 이들을 중심으로 한 구르카스 라는 군대를 따로 조직하였다. 결국 카스트제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영국도 현장에서는 카스트 제도의 영향력을 어쩌지 못했던 대표적인 사례이다. 어쨌든 크샤트리야 계급은 전통적으로 인도의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군인으로만 일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농사를 짓는다. 크샤트리야 계층의 농부들은 대개 독립성이 강하고, 민첨하고 힘이 좋고,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들이다. 일부는 땅을 직접소유하고 있고, 일부는 다른 세력들과 격리된 채 농업과 유목을 병행하기도 한다. 특히 자트족은 매우 탁월하고 부유한 농부일 뿐 아니라, 훌륭한 군인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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