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선교현장뉴스/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의 종교갈등의 역사(1) / 2006-08-08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의 종교갈등의 역사(1)

에덴동산이 만일 지금도 존재한다면 아마 그 모습은 여러 면에서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섬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술라웨시는 이전에는 셀레베스라고도 불렸던 적이 있고,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주요 섬들 가운데 하나이다.  항상 비가 알맞고 충분하게 내리고 초지와 숲이 잘 잘달되어 있으며, 높은 산은 풍광이 수려하다.  또 군데군데 알맞게 호수들이 배치되어 있고, 해변에는 야자수가 잘 자라고 있다.  술라웨시섬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무려 50가지가 넘는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종족은 다르지만 대체로 말레이족의 방계 종족들로 생각된다.

술라웨시의 역사는 격동의 연속이었다.  술라웨시가 서구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향신료 무역상들이 16세기에 이곳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두 나라의 무역상들은 당시 불라그족 해적들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불라그족은 술라웨시에서 가장 강력한 토착종족이었다.  유럽의 상선들은 이들 불라그족 해적들로부터 약탈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이 지역에서 별다른 재미를 못보고 물러난 18세기에 들어서 도이치동아시아회사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독일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독일은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들도 손아귀에 넣게 된다.

문화와 문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술라웨시는 인도네시아의 변방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새로운 사조나 문화 혹은 기술의 혜택은 수마트라와 자바에만 전해질 뿐 술라웨시로는 좀처럼 넘어오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는 역대 왕조들도 항상 자바와 수마트라에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굳혀 놓고 한숨을 돌릴 만해야 비로소 술라웨시에 관심을 갖곤 했다.   술라웨시의 종교를 생각할 때 시대별로 크게 4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2세기 경 스리비자 왕조가 술라웨시에 진출하고서야 불교가 들어왔다.  스리비자 왕조가 몰락한 뒤에도 불교는 계속 이 곳에 남아 그 뿌리를 상당하게 내렸다.  그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이슬람교가 인도네시아의 주요지역인 자바와 수마트라에 보급이 되었고, 이 두곳의 포교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술라웨시로 흘러들어왔다.  이슬람이 그 세력을 공고히 하고 술라웨시에 그 세력을 급속하게 확대하면서 불교와 힌두교는 거의 소멸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곳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511년 당시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이 술라웨시섬 근방의 또 다른 큰 섬인 멜라카를 정복하면서부터이다.  당시 멜라카섬을 지배하던 왕조는 인도네시아 역사상 마지막 이슬람 왕국으로 기록되고 있다.  정복자들을 따라 들어온 포르투갈의 카톨릭 선교사들은 멜라카섬 사람들이 의외로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다.  포르투갈이 그 세력을 넓혀 술라웨시까지 지배력을 확대하면서 기독교도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곳 사람들은 옆의 멜라카섬 사람들처럼 그렇게 복음에 호의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신자를 확보하는데 상당히 난항을 겪었고 우여곡절 끝에 교회들도 세워졌다.  물론 이때 세워진 교회는 카톨릭교회였다.

이곳에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독일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몰아내고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기 시작한 18세기 중반부터이다.  독일 선교사들은 대부분의 술라웨시 사람들이 기독교나 카톨릭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반면 몇몇 종족들이 상대적으로 복음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것에 주목했다.  또 이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생겨난 카톨릭 신자들을 개신교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개신교로 개종한 카톨릭 신자들과 복음을 새로이 받아들인 소수의 원주민들을 기반으로 술라웨시의 개신교회는 초반의 고전을 극복하고 빠른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내륙지방의 종족들은 복음을 빨리 받아들인 반면 과거에 해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불라그족 등 해안에 거주하는 종족들은 이슬람을 완강하게 고수했다.  이처럼 각 종족들이 종교적 배경이 달라지면서 종족간의 갈등은 곧 종교간의 갈등의 양상까지 함께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과거 이 섬에 불교와 힌두교가 경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도 종족간의 갈등은 종교간의 갈등의 양상까지 함께 나타났으나 이슬람이 이 지역을 석권하면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러한 양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쨌든 독일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모든 종족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일부 종족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전통적으로 섬겨온 애니미즘을 청산하지는 않아 혼합주의의 길을 걸었다.  예를 들어서 남부 술라웨시의 토르잔족은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은 하늘을 나는 배가 술라웨시 내륙의 거대한 산과 충돌하면서 이곳에 표류하여 남게된 자들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게다가 그들의 조상들에 대한 전설이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가 이리 저리 떠다니다가 산에 걸린 이야기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민족신화를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확신하고 자신들을 신성시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또 죽은 자의 무덤에 음식을 함께 묻는 풍습이 남아 있는데 그들은 그래야 죽은 자의 영혼이 이 음식을 먹으며 힘을 얻어 저승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쨌든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술라웨시에는 기독교가 전해지기는 했지만 이렇다할 부흥과 발전은 보여지지 않는 정체 양상을 띠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1915년 들어서 돌변한다.  헨드릭 폰 클리프트 라는 독일인 선교사가 이 곳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폰 플리프트 선교사와 그의 동역자들에 의해 커다란 부흥과 기독교의 붐이 함께 일어났다.  과거에는 복음에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했던 종족들이 집단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1917년 들어서 사역지를 콜라카에서 모와레로 옮겼다.  여기서 그는 톨라키족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으로 인해 톨라키족은 지금도 복음에 대해 가장 열려 있는 종족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