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의 인도인(2)
케냐에 거주하는 인도계 주민들의 수가 최고조에 이른 것은 1950년대이다. 그러나 독립을 쟁취한 1963년 이후 정부 정책은 이들 아시아계 주민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1969년에는 무역업허가법 같은 것이 제정되어 많은 무역업에 종사하는 인도인들이 케냐를 떠야 했다. 당시 이 법은 이들과 같은 외국인 무역업자들은 무역업 허가를 취소 하도록 규정했다. 정부가 이처럼 인도인들을 차별한이유는 무엇일까 몇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영국의 식민지시절부터 존재했던 역차별의 문제이다. 당시 영국 식민통치세력은 도시에 구획을 정해서 종족별로 따로 거주지역을 정해 주었다. 또 학교도 종족별로 따로 지어 그 종족의 고유의 언어로 수업이 가능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인도인들은 구자라트어를 사용하여 학교를 다니고 구자라트어가 통용되는 지역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식민정부가 의도한 바는 아닐지 모르지만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을 인도인들을 포함한 아시아계 주민들이 케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 원주민인 흑인 케냐인들에 비해 좋은 지역을 할당 받고, 학교의 시설이나 여건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이들 인도인의 일반적인 경제수준이 원주민들보다 훨씬 낫다 보니 당연히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 나이로비에서 1982년에 발생한 폭동이다. 이 폭동 사건으로 인해 많은 아시아계 상점들이 약탈 당하고 인도계 여성이 총에 맞아 살해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흑인들과 인도계 주민들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흑인 원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감정의 골로 인해 케냐의 흑인 교회들은 아시아계 이웃들에게 복음을 나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흑인들이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몇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다. 이미 긴 세월동안 인도계 아시아인들은 흑인 주류 사회나 백인 주류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고 그들끼리만의 배타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앞서서 이야기한 바대로 그들은 식민지시절부터 그들끼리만 모여 형성된 마을에서 살면서 자녀들은 구자라트어로 교육하는 그들만을 위한 학교로 보내면서 고립을 심화시켜 왔다. 또 그들은 흑인들이나 백인들과 직업적, 혹은 사업적인 교류도 극히 제한적이었고, 그들끼리만 주고 받는 방식의 폐쇄적인 사업을 영위해 왔다. 또 흑인이나 백인들과 결혼하는 것도 철저한 금기였다. 또 인도인들은 그들의 자녀가 사회활동이든, 혼인이든 어떤 면에서든 흑인이나 백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이는 종교적 영향이 컷다. 힌두교 사회에는 카스트제도라는 신분제도가 있고, 이들은 카스트 제도 하에서 같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것이 몇 천년째 뼈속 깊이 습관화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들이 같은 카스트도 아니고, 아예 종족도 종교도 다르고 피부색까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두 번째 요인은 영적인 요인이다.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적 철학을 가진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에게 이르는 길은 반드시 하나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과 종교를 통해 신에게 도달할 것이고, 기독교인이나 이슬람 신자들은 그 방식과 그 종교를 통해 신에게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남이 힌두교로 개종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지도 않지만, 기독교로 개종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는 인도인들의 눈에 비친 서구인들의 부도덕성 때문이다. 그들은 TV나 영화 등을 통해서 서구인들이 매우 비도덕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편견을 갖게 되었다. 또 케냐의 주요 관광지나 해변을 찾아오는 서구인들의 모습 역시 흥청거리고 비도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구인들은 그들이 끔찍히 금지하는 쇠고기를 자연스럽게 먹으며, 담배나 마약을 하고, 술을 마쉬며,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며, 인도계 주민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혼전동거까지 스스럼 없이 행하는 사악한 사람들로 그들의 눈에 비쳐졌을 것이다. 이러한 타락한 모습을 보인 서양인들 가운데는 스스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도 있었다. 늘 극기와 고행이 생활화된 인도인들에게 서양의 기독교인들은 상종도 하지 못할 혐오스런 동물 정도로 비쳐졌을 법하다. 이러한 인도인들은 선교사나 전도인들과도 별로 상종하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기독교인들, 혹은 선교사들이라면 그들이 아는 보통의 서양인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별된 삶은 산다는 기독교인들, 혹은 선교사들의 옷차림을 생각해 보자. 케냐는 더운 나라이다. 케냐보다 훨씬 추운 유럽에서 온 여성 기독교인 혹은 선교사의 옷차림이 무릎 정도에 오는 스커트와 반팔 셔츠를 입었다면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단정하고 일상적인 옷차림이지만, 인도인의 기준에서 보면 노출이 심한 타락한 옷차림일 수도 있다.
네 번째는 케냐의 흑인 기독교인들이 갖는 편견이다. 일반적으로 흑인들은 기독교가 인도인들의 종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들은 힌두교 신자들이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좀처럼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미 학습효과에 의해 고정관념으로 뇌리에 박혀 버린 것이다. 그들은 인도인들을 전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들은 극소수의 힌두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 아예 가족과 마을과 사회로부터 추방당하는 사례도 자주 보아 왔다. 이러한 경험이 축적되어 케냐의 흑인 기독교인들은 인도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실상 완전히 포기하고 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은 케냐의 인도인들을 향하여 일을 하셨고, 소수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지난 1967년 이후 곳곳에서 힌두교 혹은 이슬람이나 시크교를 믿다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생겨났다. 나이로비에는 아시아인 신앙공동체가 네 곳 형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세 곳의 교회는 그 규모가 제법 커서 인근의 다른 아시아인들이나 다른 네 곳의 도시의 아시아계 주민들을 향한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1992년에는 Asian Concern Kenya(ASKEN)이라는 선교단체의 주도로 나이로비의 흑인교회를 대상으로 아시아계 주민 선교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를 통해 흑인교회들은 인도계 주민들을 향한 잊고 있던 사명감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물론 인도계 기독교인들의 동족을 향한 선교의 사명도 새롭게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 당시 케냐의 인도인들을 위해 사역하는 선교단체는 한 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도계 주민들에 대한 영적 부담을 지고 있는 기관이 다섯 곳으로 늘어났다.
케냐에 거주하는 인도계 주민들의 수가 최고조에 이른 것은 1950년대이다. 그러나 독립을 쟁취한 1963년 이후 정부 정책은 이들 아시아계 주민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1969년에는 무역업허가법 같은 것이 제정되어 많은 무역업에 종사하는 인도인들이 케냐를 떠야 했다. 당시 이 법은 이들과 같은 외국인 무역업자들은 무역업 허가를 취소 하도록 규정했다. 정부가 이처럼 인도인들을 차별한이유는 무엇일까 몇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영국의 식민지시절부터 존재했던 역차별의 문제이다. 당시 영국 식민통치세력은 도시에 구획을 정해서 종족별로 따로 거주지역을 정해 주었다. 또 학교도 종족별로 따로 지어 그 종족의 고유의 언어로 수업이 가능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인도인들은 구자라트어를 사용하여 학교를 다니고 구자라트어가 통용되는 지역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식민정부가 의도한 바는 아닐지 모르지만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을 인도인들을 포함한 아시아계 주민들이 케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 원주민인 흑인 케냐인들에 비해 좋은 지역을 할당 받고, 학교의 시설이나 여건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이들 인도인의 일반적인 경제수준이 원주민들보다 훨씬 낫다 보니 당연히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 나이로비에서 1982년에 발생한 폭동이다. 이 폭동 사건으로 인해 많은 아시아계 상점들이 약탈 당하고 인도계 여성이 총에 맞아 살해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흑인들과 인도계 주민들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흑인 원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감정의 골로 인해 케냐의 흑인 교회들은 아시아계 이웃들에게 복음을 나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흑인들이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몇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다. 이미 긴 세월동안 인도계 아시아인들은 흑인 주류 사회나 백인 주류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고 그들끼리만의 배타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앞서서 이야기한 바대로 그들은 식민지시절부터 그들끼리만 모여 형성된 마을에서 살면서 자녀들은 구자라트어로 교육하는 그들만을 위한 학교로 보내면서 고립을 심화시켜 왔다. 또 그들은 흑인들이나 백인들과 직업적, 혹은 사업적인 교류도 극히 제한적이었고, 그들끼리만 주고 받는 방식의 폐쇄적인 사업을 영위해 왔다. 또 흑인이나 백인들과 결혼하는 것도 철저한 금기였다. 또 인도인들은 그들의 자녀가 사회활동이든, 혼인이든 어떤 면에서든 흑인이나 백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이는 종교적 영향이 컷다. 힌두교 사회에는 카스트제도라는 신분제도가 있고, 이들은 카스트 제도 하에서 같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것이 몇 천년째 뼈속 깊이 습관화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들이 같은 카스트도 아니고, 아예 종족도 종교도 다르고 피부색까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두 번째 요인은 영적인 요인이다.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적 철학을 가진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에게 이르는 길은 반드시 하나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과 종교를 통해 신에게 도달할 것이고, 기독교인이나 이슬람 신자들은 그 방식과 그 종교를 통해 신에게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남이 힌두교로 개종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지도 않지만, 기독교로 개종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는 인도인들의 눈에 비친 서구인들의 부도덕성 때문이다. 그들은 TV나 영화 등을 통해서 서구인들이 매우 비도덕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편견을 갖게 되었다. 또 케냐의 주요 관광지나 해변을 찾아오는 서구인들의 모습 역시 흥청거리고 비도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구인들은 그들이 끔찍히 금지하는 쇠고기를 자연스럽게 먹으며, 담배나 마약을 하고, 술을 마쉬며,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며, 인도계 주민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혼전동거까지 스스럼 없이 행하는 사악한 사람들로 그들의 눈에 비쳐졌을 것이다. 이러한 타락한 모습을 보인 서양인들 가운데는 스스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도 있었다. 늘 극기와 고행이 생활화된 인도인들에게 서양의 기독교인들은 상종도 하지 못할 혐오스런 동물 정도로 비쳐졌을 법하다. 이러한 인도인들은 선교사나 전도인들과도 별로 상종하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기독교인들, 혹은 선교사들이라면 그들이 아는 보통의 서양인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별된 삶은 산다는 기독교인들, 혹은 선교사들의 옷차림을 생각해 보자. 케냐는 더운 나라이다. 케냐보다 훨씬 추운 유럽에서 온 여성 기독교인 혹은 선교사의 옷차림이 무릎 정도에 오는 스커트와 반팔 셔츠를 입었다면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단정하고 일상적인 옷차림이지만, 인도인의 기준에서 보면 노출이 심한 타락한 옷차림일 수도 있다.
네 번째는 케냐의 흑인 기독교인들이 갖는 편견이다. 일반적으로 흑인들은 기독교가 인도인들의 종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들은 힌두교 신자들이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좀처럼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미 학습효과에 의해 고정관념으로 뇌리에 박혀 버린 것이다. 그들은 인도인들을 전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들은 극소수의 힌두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 아예 가족과 마을과 사회로부터 추방당하는 사례도 자주 보아 왔다. 이러한 경험이 축적되어 케냐의 흑인 기독교인들은 인도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실상 완전히 포기하고 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은 케냐의 인도인들을 향하여 일을 하셨고, 소수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지난 1967년 이후 곳곳에서 힌두교 혹은 이슬람이나 시크교를 믿다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생겨났다. 나이로비에는 아시아인 신앙공동체가 네 곳 형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세 곳의 교회는 그 규모가 제법 커서 인근의 다른 아시아인들이나 다른 네 곳의 도시의 아시아계 주민들을 향한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1992년에는 Asian Concern Kenya(ASKEN)이라는 선교단체의 주도로 나이로비의 흑인교회를 대상으로 아시아계 주민 선교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를 통해 흑인교회들은 인도계 주민들을 향한 잊고 있던 사명감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물론 인도계 기독교인들의 동족을 향한 선교의 사명도 새롭게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 당시 케냐의 인도인들을 위해 사역하는 선교단체는 한 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도계 주민들에 대한 영적 부담을 지고 있는 기관이 다섯 곳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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