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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뉴스/케냐

케냐의 인도인(1) / 2006-10-17

케냐의 인도인(1)

"케냐에 남부 아시아계 주민이 살고 있다 "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실제로 케냐에는 남부 아시아계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케냐에서는 소수종족에 속하지만 상당히 의미 있고 중요한 소수종족들이다.  이들이 케냐 사회에 공헌하는 정도도 상당하지만 의외로 이들의 역할은 잘 안알려져 있다.  불행한 점은 케냐가 기독교인들의 비중에 매우 높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케냐 동부에 거주하는 이들 남부 아시아계 주민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거의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을 축복하도록 축복 받은 기독교인이 이슬람이나 힌두교, 혹은 시크교를 믿는 이들을 축복하지 못하고 있고, 그로 인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1963년에 케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나라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이들 아시아인들은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과목의 교과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을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나이로비의 케냐 국립박물관의 전시 내용을 보면 이러한 잘못을 바로 잡고 아시아인들의 역할을 재평가해 보려는 노력이 정부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이들 아시아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독립과 건국에 어떤 식으로 공헌을 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동부 아프리카에 인도인들이 살기 사적한 것은 3천 년 전부터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규모의 인도인들이 거주하면서 의미 있는 규모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최근 200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인도와 케냐를 왕래한 인도인들 가운데 그나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경우는 인도 서부의 구자라트주의 쿠치족이 케냐를 왕래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1498년에 바스코 다가마가 케냐-인도 루트의 탐험을 통해 개척한 항로를 이용해 케냐를 왕래하였고, 일부는 케냐에 정착했다.  인도 서부 해안에서 유입된 석공들은 1593년부터 1596년 사이에 몸바사에 건설된 Fort Jesus 요새 건설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또 1820년대부터 시작된 파테섬, 몸바사, 잔지바르 등의 대규모 주거단지 건설에 있어서 인도의 장인들은 주요 건물의 출입문이나 가구 등 섬세한 손재주를 요하는 부분을 담당하기도 했다.

1896년부터 시작된 몸바사와 빅토리아 호수를 있는 우간다 철도공사는 1901년에야 끝났다.  이 대공사를 위해 수많은 인도인이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이 때 들어온 인도인의 규모는 역사상 최대규모로 꼽힌다.  영국 식민통치자들은 이 공사를 위해 펀잡과 구자라트를 중심으로 무려 3만 1천 명이나 되는 인도인들을 모집하여 데리고 들어왔다.  당시 철도공사는 자동화되거나 첨단화 된 장비 없이 전적으로 노동자의 노동력에 의존해서 진행되었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철도공사는 중노동이었고 공사 도중 과로 혹은 사고로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통계에 의하면 철도 공사 1마일 당 4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고 한다.  이는 6년 간의 공사기간 동안 매월 38명이 사망한 꼴이다.  이와는 별도로 6,400 명이 불구가 되었다.

이들 인도인들이 동부 아프리카, 특히 케냐에 공헌한 공로는 이 철도공사만이 아니다.  이후 수십년 동안 이들은, 운전기사, 기술자, 공사감독, 철도관리 업무, 전보송수진업무, 전기관리, 기계, 목수 등 전문 기술직을 담당했다.  나이로비, 나쿠루, 키수무 등 최소한 40 개 이상의 기차역과 철도가 이들에 의해 세워졌다.  1895년부터 영국의 식민통치자들이 체계적인 행정시스템을 세워나가자 이들은 식민정부의 사무직이나, 자료관리, 보건의료 업무, 교사 등의 주요한 직책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영국과 교역을 하는 무역업체들의 연합조직 결성을 주도하여 업체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압장서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도인 사회의 규모는 점점 늘어났지만 식민정부는 늘어나는 인도인들에 대한 적절한 처우를 해 주는데 실패했다.  이로 인해 인도인들은 식민정부에 등을 돌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스스로 대변하는 이익단체를 조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부를 지키기 위한 조직을 만들고 인도인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인도인들을 위한 보건의료 기관도 세웠다.  이로 인해 이들은 케냐에 있으면서도 인도인만의 문화와 스포츠활동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갔다.

케냐의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게 되자 인도인들은 이 독립운동에도 합세했다.  AM 제반지나 MA 데사이 같은 인도인들은 최근 남부 로디지아나 남아프리카 등에서 볼 수 있는 아파르트헤이드 같은 것과 유사한 운동을 벌이면서 백인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또 마우마우 폭동으로 조모 케니야타 같은 케냐인 지도자들이 구속되자 이들을 변호하고 구명하기 위한 운동에 깊숙히 개입하기도 했다.  조모 케니야타는 훗날 신생 케냐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또 많은 인도인들은 신문 등을 창간하여 식민통치자들에 대항하여 아프리카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독립의 여론을 이끌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