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디브, 힘겹게 부는 개혁의 바람(1)
몰디브는 인도에서 남서쪽으로 500 km쯤 떨어진 산호섬 무리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몰디브공화국의 섬들의 분포는 넓어서 한쪽 끝에 있는 섬에서 다른 반대쪽 끝에 있는 섬까지의 길이가 855 km에 이른다. 매우 경치가 빼어나기 때문에 관광지로도 인기가 높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오래 동안 가장 종교적 압제가 심한 이슬람공화국으로 알려져 왔다. 정치적으로도 전체주의적 독재와 정치적 폭력 그리고 종교적 억압이 난무하면서 인권남용이 심각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디브 내부에서는 어느 수준 이상의 개혁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 같다. 지난 2004년에는 가이욤 대통령의 주도로 일련의 개혁프로그램도 시작되었다. 이는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인 개혁 압력에 직면하여 이를 무마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가이욤 대통령이 진심으로 원해서 추진하는 개혁은 아니었기 때문에 개혁의 추진은 매우 더디었고 적지 않은 장애물을 만나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욤 대통령 스스로 진심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의 입으로 개혁의지를 천명한 바 있기 때문에 작은 변화라 하더라도 있을 수밖에 없고, 우리는 거기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때문에 지금 몰디브에서는 느린 속도의 개혁, 피상적인 수준의 개혁이나마 진행되고 있고, 이로 인해 새로운 몰디브 건설에 대한 희망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즉 개혁의 속도가 빠르지 않기 때문에 가이욤 대통령의 계속 집권과 철권통치에는 별 이상이 없겠으나 좀 더 길게 전망해 보면 결국 언젠가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지금 이 순간의 작은 변화가 그 모멘텀이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는 것이다.
몰디브는 이슬람 이외의 모든 종교가 금지되어 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거쳐서 극소수의 기독교 신자가 생겨났다. 그 숫자는 많아봐야 수십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 이유는 인근 셰이셀 공화국에서 이 나라를 향해서 송출하는 방송전파를 통해 몰디브 인들이 기독교 방송을 접하게 되었고, 기독교 관련 서적과 성경이 은밀하게 반입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신자가 된 사람들은 발각될 경우 극심한 박해를 감수해야 했다. 1998년 6월에는 50 명의 기독교인들이 단속에 걸려 몰디브에서도 가장 악명 높다는 두니두 교도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두니두교도소는 수도 말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섬에 있는 교도소이다. 또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던 외국인 사역자 25명도 함께 적발되었다. 이들은 모든 소유물을 다 압수 당하고 추방되었다. 한편 구속된 몰디브인 신자들은 극심한 고문과 함께 강제로 이슬람 종교 의식에 참여하게 되었고, 개종도 강요당했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신자들은 고문에 못이겨 다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몰디브 민주화와 신앙의 자유 허용, 그리고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압력이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결국 구속자들은 개종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1998년 11월에 석방되었다. 몰디브 정부가 비록 압력에 굴복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인들을 자유롭게 놓아준 최초의 사례인 것이다.
정치적인 진전도 발생했다. 2003년 9월에 정치범 한 사람이 심한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몰디브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제적인 압력이 매우 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이욤 대통령은 압력을 무마하기 위해 개혁과 민주화를 약속했다. 2004년 들어서 이 사건을 계기로 개혁에 대한 욕구는 크게 분출되고 가시적인 성과도 나타났다. 즉 가이욤 대통령은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고, 정당의 결성을 허용하며, 사법권을 분리하고 총리제를 신설하여 권력을 분점하는 등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가이욤의 개혁안은 처음부터 자발적인 개혁의지가 담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열화같은 개혁 요구가 좀 진정되고 시간도 경과하자 다른 소리를 하며 민주화 인사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2004년 8월 12일에는 5천 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8월 9일에 체포된 민주화 인사 5명을 석방할 것과 정부 내의 강경파로 분류되는 인사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이들의 시위와 연설 집회는 밤을 꼬박 넘겨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이에 정부는 무력 진압으로 대응했다. 심지어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수색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야당인 몰디브민주당(MDP) 당원들은 심한 폭행을 당했고 90명이 체포되었다. 또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사건을 몰디브의 천안문사태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가이욤 대통령도 대세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강경 탄압과 함께 몇 가지 개혁정책도 함께 제시했다. 이를 위해 가이욤 대통령는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로스쿨 교수인 다니엘 파이퍼스 교수를 초청하여 법률자문과 법안 입안을 맡겼다. 그러나 이 때 가이욤 대통령이 파이퍼스에게 내린 지침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법체계의 틀 안에서 형법의 방향을 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이퍼스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샤리아의 요소를 형법에서 완전히 빼야만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인 2004년 12월 동서남아시아를 강타한 해일이 몰디브도 덮쳤다. 이에 가이욤 대통령은 민심을 수습하고 보다 효과적인 복구를 위해서는 외국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보다 개방과 개혁의 폭을 확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어쨌던 그가 개혁의지를 천명한지 이미 3년이 지나고 있지만 개혁의 속도는 매우 느리다. 그러나 진행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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