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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 위나라 선교사

Dr.M Think Factory 2011. 10. 12. 12:24

인도 - 위나라 선교사

이따오!, 이따오! 진리다! 진리다!”를 가슴이 터져나듯, 한 목소리로 외치며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끌어안았다.  추장도 추장의 어머니도 전사도 남자도 여자도 가슴속 영원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따오”를 외치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벌거벗은 300여 원주민의 기쁨과 감격과 환희의 춤은 2시간이 넘게 계속되었다. 자신들이 십계명으로 죄인인 것을 알게 되어 두려워하던 그들이 오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진실이며 자신들을 구원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였다. 

이 부족은 파푸아뉴기니 목 부족(Mok Tribal)의 모습이다. 목 부족은 마크 주크 선교사가 지금도 사역하시는 곳이다. 이 부족 형제의 모습은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짧은 20여분의 시간이 지나고 언제부터 울기 시작하였는지 저희 손에는 휴지가 쥐어져 있고 옆에는 눈물에 젖은 휴지가 가득하였다.  벌거벗은 300여명 구원 깨닫고 “이따오!”  1990년 어느 날 한국에 온 마이크 슐츠 ‘새 부족선교(New Tribes Mission)’의 선교사 부부를 만나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자기 부족 외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원시림의 원주민들, 원시생활의 벌거벗은 모습, 두려움으로 선교사를 대하던 눈동자와 몸놀림, 말소리만 있고 글이 없었고, 복음 전하는 발걸음이 없어 이전에는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원주민들. 

그러나 이 부족민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을 가르칠 때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하신 사건을 듣기도 전에, 이삭을 대신하여 양을 죽이면 안 되냐고 선교사를 찾아와 애절하게 간청하던 추장과 청년들의 모습. 오직 저들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 침통해하는 모습.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고 기뻐서 춤을 추며 “이따오!”를 외치며 그들은 간증을 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는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어 저는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외치던 모습.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선교사가 녹음해준 성경 말씀을 듣는 원주민의 진지한 모습. 임산부가 자신의 모습을 남자에게 보이면 남자들이 부정하다고 죽이는 풍습 속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사가 전하는 말씀을 잘 듣기 위하여 바나나 잎사귀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말씀을 전하는 자리 가까이까지 조심스레 가서 그 뒤에 숨어 복음을 듣는 부족의 여인들.

그 모습은 우리에게 충격이었고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흥분과 눈물로 저희 마음을 흔들어 버렸다. 과거의 나의 신앙생활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를 갖지 못했던 믿음 없는 나약함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식인종이었던 미개한 원시림의 부족은 저희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던 그들이 커다란 믿음의 거목처럼 보였다. 그들은 더는 정글 속의 원주민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같은 믿음 안의 형제들이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번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했던 나는 중학교 때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처음으로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였던 감격으로 살았다. 1970년대 청년시절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호주 선교사 롸드니와 남아프리카의 로드 선교사와 함께 이태원 밤거리에 나와 있는 미국 군인과 자매들을 전도하고 속박되어 있던 환경으로부터 구출하여 시설 은혜 원으로 보내 새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었다.

일과 후 마지막 버스를 탈 때면 전도 지를 승객의 무릎에 놓으면서 “읽어 보세요” 하고 나누어 준 후 집으로 돌아와야 하루의 일을 다 한 것 같은 행위의 삶을 살았다. 교회에서 새벽기도로 찬양 팀으로 주일예배는 물론, 교회 공동체 모임에서 열심을 다하며,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 같이 자족하며 지냈다. 매주일 밤이면 두 아들은 부모를 기다리다 자동차 뒷자리 좌석에서 지쳐 교회를 가는 것이 가장 힘든 것이 되어 버린 지도 오래되었는데 교회성도들이 나를 부르기를 “만인의 시동생” 또는 “천사”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힘든 일, 더러운 일도 마다 않고 열심을 다하였다. 

그것이 마치 믿음 생활인 줄 알고 살고 있던 나였다. 매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고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데리고 금식 기도원으로 가서 아이들을 그 뜨거운 방에 두고 3일 동안 금식하며 하루 다섯 번 진행하는 예배에 참석한 후 “이제 제가 할 일을 하였으니 저희 삶을 적어도 일년 동안 책임져 주십시오” 하며 자족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요 믿음인줄 알던 나였다. 

신앙은 나의 삶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파푸아뉴기니 믿음의 원주민을 만나면서 나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에 한번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부족의 형제들은 벌거벗고 사는데 나는 가진 옷이 얼마나 많은지, 부족의 형제들은 신발을 한번도 신어 본 적이 없다는데, 나는 얼마나 많은 신발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보다도 나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부족의 형제들은 자기 말로 된 성경이 없어 말씀을 읽지 못한다는데 내가 가진 성경책이 무려 10여권이나 되었다. 책상에도 책꽂이에도 몇 권, 자동차에, 화장실에, 거실에 진열하듯 펴놓아 색 바랜 성경. 사무실 등 내가 움직이는 곳곳에 놓여 있는 성경책들. 한번도 원주민처럼 말씀을 눈물 흘리며 기뻐하며 감격하며 읽어 본적이 없던 나였다. 가끔 성경 암송대회가 있을 때 마음속으로 불평을 하며 체면 때문에 대회에 참석을 하면 언제나 일등은 연세 많으신 권사님 차지였다. 

나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마음속에서 혼란과 갈등이 일어났다. 지난날의 나의 신앙생활은 행위로 인한 만족에 머물러 있었으며 부족 형제들과 같은 말씀의 감격도 애절함도 없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말씀에 따라 행동이 믿음 안에서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는 나의 믿음과 신앙이 나의 삶의 선택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부족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많이 가졌다는 것이, 그리고 말씀의 감격이 없다 것이, 행위로만 살아 왔다는 것이, 부족의 형제들을 향하여 미안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죄인으로 거짓된 신앙인이었는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이 죄인을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진정한 나를 찾기를 원합니다. 말씀이 나에게 인격으로 오신 주님이 되게 하옵소서. 언제나 말씀은 물론이며 믿음을 관념 속에만 가지고 행위로만 살아온 이 죄인을 용서하옵소서. 긍휼 가운데 두사 말씀을 알게 하옵소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오니 이 죄인을 도우소서. 아멘.